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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인어공주’, 가장 숭고한 사랑에 대하여

1989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에서 이 영화는 안데르센 원작의 비극이 지닌 공허함을 단호하게 포기하는데, 아마도 30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가 동화 속 ‘불가능한 사랑’을 옹호하지 않았기에 관객 다수가 이 애니메이션의 제안을 환영했던 것 같다. 동화란 원래 구전되거나 문서화되며 상황에 맞게 변화되는 특징을 가진 장르다. 따라서 영화화 과정에서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변형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의 언급처럼, 과거 디즈니의 영상화 작업은 안데르센 특유의 ‘뒤틀린 욕망’이 지닌 환영을 타파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의도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작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텍스트의 합리성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원주의적 해석이 관심을 받으면서 작품 스스로의 ‘지각가능성’ 여부가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사화된 <인어공주>(2023)는 그런 면에서 그 변화를 세밀히 살필 만한 가치가 있다.

고정관념 타파에 몰두하다

사실 <인어공주>는 제목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한 내러티브 프레임워크를 가진 영화다. 이번 버전에서 첫 번째의 논란은 주인공의 캐스팅 발표 이후에 불거졌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종적 편견보다는 과도하게 이론적인 이야기에 의해 호불호가 나뉘는 것 같다. 마치 디즈니+의 ‘이야기는 중요하다’(#StoriesMatter) 이니셔티브가 극장판으로 확장된 기분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문제는 영화적 검열, 혹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에 대한 논의와 연관되어 있다. 현재의 디즈니는 마치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마음먹은 듯 열렬히 이성적인 수정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반PC주의 담론이 영화의 이슈를 이끄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관객은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려는 의도가 있는 영화에 대한 대처법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그렇지만 디즈니가 내놓은 이 새로운 코드에 대한 자신감은 꺾이지 않는다. 작품 스스로가 촉발하는 위협의 함정을 그들은 잘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 대한 감각이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부각되어서 놀라웠다. 시작부의 리듬은 기대보다 빨랐고, 전개 과정에서 과도한 리소스는 다소 부담이 됐다. 때문에 뮤지컬영화 특유의 리듬감이 가려지지만, 작품은 나름 꽤 괜찮은 균형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결과 마법적인 동화와 현실의 간극이 완전히 메워지지 않는 것은 아쉬웠다. 이를테면 영화는 의도적으로 스스로의 공간을 짙게 채색해서 신화에서나 볼 법한 세이렌 캐릭터를 조금도 성스럽지 않은 상태로 내놓는다. 영화 속 인어들의 모습은 기존의 슈퍼히어로영화와는 달리 전능하지 않다. 일부 신화적인 요소마저 삭제하면서, 새로운 존재들의 모습이 인간과 흡사하게 묘사된다. 이른바 마법의 삼지창으로 대변되는 막대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물 밖 세상과 마찬가지로 물속은 평범하게 통치되고 있다. 명확하게 지형이 설정되지 않더라도 에릭(조나 하워킹)이 사는 곳도 상황은 같다. 마냥 빛나는 왕국이 아니라 그곳은 발전되어야 할 작은 나라일 따름이다. 롭 마셜의 새로운 <인어공주>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설정에서도 기존의 동화를 벗어난다. 완벽하게 냉소적인 태도로, 이 실사영화는 고정관념 타파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아이러니가 관찰된다. 언뜻 불안정하게 느껴지지만, 이 요소들은 꽤나 유머러스해서 누구나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가장 먼저, 에리얼(핼리 베일리)이 관장하는 보물창고가 눈에 띈다. 그녀는 인간의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물품들은 아무리 보아도 외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 그저 침몰한 배의 일부에서 발췌한 녹슨 장비들일 따름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주인공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고작 이런 물건 때문에 바다를 떠나는 것은 어리석다고 그녀를 붙잡고 설득하고 싶어진다. 트라이튼 왕의 모습도 그 권위만큼 감동적이지는 않다. (특히 마지막 결말의 현실감은 치명적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그는 완고하게 자식을 통제하는 인물이다. 때로는 논리적이지 않은 채로 감정을 내세우고, 인간적 품성으로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 영화가 그리는 로맨틱한 순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에릭의 등장 이후에 시작되는 인물들간의 화해는 예상만큼 깊게 마음을 두드리지 않는다. 주요 테마인 <Part of Your World>가 울려 퍼지는 동안의 인어공주 모습은 스산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호소하는 마음이 아닌 욕망이 클로즈업되는 것 같다. 단언컨대 핼리 베일리가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지배하는 그래픽의 모든 공간을 로맨틱한 구성과는 거리가 멀게 배치했다. 대신 지극히 현실적인 감상을 그 자리에 두었다. 마치 현존하는 세상의 어느 모습처럼, 모호한 따스함이 공간에 배어든다. 아마도 이는 주제와 연관될 것이다. 한마디로 ‘완벽한 로맨스의 상황’이 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영화는 의도적으로 표면의 모든 아름다움을 삭제하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당당함

생각해보면 시작부에 적힌 문장 하나가 이 모든 상황을 암시한다. 바로 안데르센의 원작에서 빌려온 “인어는 눈물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더 고통스럽다”는 인용구다. 일차적으로 이 문구는 물리적인 환상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인어는 눈물이 없다. 때문에 인간과 구분되는 물리적인 외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어지는 ‘더 고통스럽다’는 문구는 감정적으로 두 개체가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다. 즉 아무리 생김새가 다르더라도 내적으로 소통해야만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안데르센 동화의 결말이 ‘신성한 파괴’에 매달린 것과 달리 애니메이션의 엔딩이 ‘행복한 사랑’으로 끝난 것과 달리 이번 영화의 결말은 ‘모험의 시작’으로 완성된다. 건조하고 퉁명한 이 영화의 결말은 그 어떤 사랑보다 큰 관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시점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사랑이 바로 ‘포용’이라고 영화는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주토피아>(2015)의 성공적인 망령이 이 새로운 <인어공주>를 뒤덮은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과격한 이 영화의 주제가 예상을 뛰어넘어 직진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 누가 핼리 베일리의 인어공주가 보여주는 거친 당당함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아무리 대안적인 정치 담론을 가정하더라도, 그녀의 철없는 강한 성질을 밀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디즈니가 구축한 클래식의 원형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문화 소비에는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문장이 내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1990년대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낡은 지면 광고처럼, 나란히 모든 인물들이 투사되는 최후의 이미지는 끝까지 재고되었어야 했다. 이야기가 지닌 선의에 매료되고자 하는 투쟁적 의지를 이 무분별한 반복은 흐트러트린다. 이 부분만큼은 취향의 다름으로 은근슬쩍 가려지지 않는다. 이외 대부분의 균형은 만족스러웠다. <인어공주>는 한마디로 극장에서 관람할 가치가 있는, 내면이 아름다운 뮤지컬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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