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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그 여름’, 지극히 마술적인, 또한 사실적인

2010년, 당시 대학생 한지원은 <코피루왁>이라는 24분(!) 분량의 단편(!)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비유와 상징, 함축 등의 기존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의 미학에서 벗어나 드라마 연출의 정공법을 택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뿍 담아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10대 후반 주인공들은 주저 없이 질주했다. 넘치는 에너지와 탄탄한 기본기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기본기와 연출력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추진력일 뿐이라는 듯, 2013년 <학교 가는 길>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간극을 한껏 벌리면서 한지원만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각인시켰다.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한지원의 작품들 속 청춘이 겪는 현실 사회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일지니.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정적이면서도 억압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막연한 기대를 꿈꾸지만, 정작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 그러고는 쉼표도 없이, 대학원 준비생의 고민을 다룬 <럭키미>와 사내 커플의 은밀한 이야기인 <사랑한다 말해>를 연달아 만들고는, 네 작품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서 2015년 초, 장편애니메이션 <생각보다 맑은>을 발표했다. 한지원에게는 “최연소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따랐다.

그러니까 <그 여름>은 한지원의 두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젊은 소설가상”을 수상한 ‘젊은’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소설을 ‘젊은’ 애니메이션 감독이 선택하기까지에는 많은 고민과 난제가 있었을 터. (준)상업적 애니메이션이 과거의 ‘명작’ 소설을 작품으로 만들기는 했어도, 동시대의 문학이 동시대의 애니메이션과 만난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다(그 흔치 않은 사례 중 하나가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웹애니로 만든 한지원의 작업이다). 하물며 ‘퀴어’ 이야기라면, 애니메이션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가 웹툰이나 웹소설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만나는 게 훨씬 수월하게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름>은 이미 예정된 운명처럼 <생각보다 맑은>과 겹치듯 스치고, 스치듯 겹친다.

“수이와 나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 애니메이션 <그 여름>의 첫 내레이션이다. <그 여름>이 여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나듯, 이전 작 <럭키미>는 가을에서 시작해서 가을로 끝이 난다. “하늘에 남아 있는 작은 구름 하나까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면, 가을은 끝난다… 지금 아쉬운 건 역시, 가을이 너무 짧다.” 주인공 고구마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해 말한 문장이다. <그 여름>이 열여덟에서 시작해서 스물한살까지를 다루었다면, 그 시간대 속에는 열일곱에서 시작해서 스무살에 이르는 <코피루왁>의 시간이 포개진다. 여기에 앞날을 읊조리는 문장을 가져와보자. <코피루왁>에서 강보는 말한다. “이제 입시의 험난한 지옥을 거쳐, 대학이라는 자격증을 손에 넣은 뒤… 인도네시아에서만 생산되는 사향고양이 커피, ‘코피루왁’을 마셔줄 수 있는, 벌이가 좀 되는 괜찮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봐”(이 문장은 여주인공 예미가 마지막에 다시 되뇐다). <그 여름>에서 수이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이렇게 들려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같이 떠나자. 어디든 둘이 같은 도시로. 난 대학 축구부에 들어가서, 졸업하면 실업팀 선수로 뛸 거야… 둘이 그렇게 처음에는 월세에서 자취하다가… 선수 생활 은퇴하면 운동 관련 사업을…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성장 드라마에 등장하기에는 지극히 현실 타협적인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강보와 수이, 두 인물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는다. 어른들의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났다.” 소설은 3인칭 문장으로 시작한다. 애니메이션은 이를 주인공 김이경의 1인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시작은 사고였다”라는 두 번째 문장을 애니메이션은 생략한다. 원작에서 이 문장은 가히 모든 것을 함축하는 가장 핵심임에도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3인칭을 1인칭으로 풀면서, 생략한 핵심 문장을 영상 속에서 녹여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시작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원작의 일부를 가지쳐내며 이경-수이-은지의 삼각관계로 재편된다. 자칫 ‘퀴어’는 소재주의로 빠지고, 눈을 간지럽히는 유미주의적 영상과 진부한 로맨스 클리셰의 전개로 흘러갈 수도 있다(하물며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처리하는 흔한 컬러인 ‘갈색’마저도 이야기 속에서는 이경을 ‘이질적인’ 인물로 만드는 지점이다). 한지원의 연출은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작품의 중간 지점, 분식집에서 둘은 여행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건 수이이고, 훗날 독일로 함께 여행 갈 계획으로까지 흘러간다. 수이의 계획을 듣는 이경의 머릿속에서는 돌연 둘의 관계에 대한 불확실성이 엄습한다. 대화의 배경으로 당시 2002 한일 월드컵 방송이 깔린다.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다가 부상으로 모든 것이 뒤틀어진 수이, 이 때문에 이경은 수이에 대한 걱정과 연민, 불안을 느낀다. 바로 그다음 장면은 방학을 맞아 고향 집으로 돌아온 이경. 저녁 거실에서는 여전히 월드컵 소식이 나오고, 부상당한 한국 선수의 표정을 비춘다. 그 표정이 불러낸 것은 수술 자국이 선명한 수이의 부상 부위와 한밤중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는 수이의 모습. 그러고는 고등학생 때 함께 자주 찾던 강가를 다시 찾아가는 이경, 그곳에서 되살려낸 지난날의 수이(미래를 말하던 부상 전 모습,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두며 좌절한 모습, 정비일을 택한 이유를 끝내 말하지 않는 모습). 그러면서 더이상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수이와의 거리감 때문에 답답해하는 이경 자신. 4분 남짓한 이 전개 속에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서로가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했기에 야기되는 소통의 부조화가 섬세하게 담긴다. 이경과 은지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도 놓칠 수 없다. 빵집에서 돌연 만나게 된 이경과 은지. 이경의 화상 입은 손을 은지가 치료할 때, 은지의 손목시계에 반사된 빛이 천장 위를 비춘다. 이후 이경도 손목시계를 구입하여 착용하고, 은지가 이를 알아본다. 은지가 한동안 나타나지 않자 이경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던진다. 손목시계와 반사된 빛을 통해 이경과 은지의 마음이 어떻게 전해오고 교감하고 그리워하는지를 보여주는 설정이다. 문장으로도, 대화나 독백으로도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한 지점을 영상으로 그려낸 지점이다.

<그 여름>은 2021년 애니메이션 전문 OTT 플랫폼을 위해 7부작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3년 극장 개봉을 위해 하나의 장편으로 재단장했다. 한지원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그렇게,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전이한다. 때론 단편으로, 때론 장편으로, 때론 웹애니로, 때론 OTT 시리즈로. 무엇보다 <그 여름>은 이전까지 거의 1인 창작에 가까웠던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기획과 제작을 분리하고 자신이 기획(전체 연출과 각색, 디자인)을 담당하고, 애니메이션 제작은 전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여러 협력 스튜디오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좀처럼 함께하기 힘든 독립애니메이션과 상업애니메이션의 협업인 셈이다. 그사이, 2022년 한지원은 단편애니메이션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를 발표하면서, 마술적 리얼리즘의 성취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오늘날, 문학과 영화 사이에서 애니메이션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작품이다(그러면 당연히 두번은 돌려볼 것이다). 어쩌면 한지원의 창작, 그 자체가 마술적이면서도 지극히 사실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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