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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멀티버스, 히어로영화를 망치기 위해 온 구원자, ‘플래시’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송경원 2023-07-0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놀랍도록 닮았다. 비슷한 시기에 당도한 <플래시>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다중우주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식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해 보인다. 두 영화는 모두 이야기의 고정좌표를 만드는 걸로 멀티버스가 초래한 혼란을 수습한다. 사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했던 다수의 영화에서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꿀 수 없는 사건도 있다는 고정값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요컨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운명론.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야기란 A에서 B로 이동하는 궤적의 기록이다. 시작점과 종료점이 있는 한 그 사이에서 어떤 복잡한 과정을 경유하더라도 하나의 이야기는 완료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의 문을 닫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바로 문제의 멀티버스 때문이다.

운명론과 자유의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이하 <엔드게임>) 이후 멀티버스를 새로운 무대로 제시했을 때만 해도 멀티버스는 얼핏 이야기를 마구 늘려나갈 수 있는 무한대의 마법처럼 보였다. <엔드게임>에서는 과거를 바꾸기 위한 시도를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시간 강탈이라고 표현한다. 무수한 타임라인 속에서 과거 시점으로 이동해 인피니티 스톤을 빌려올 뿐 자신들의 시간 선에 개입해 과거를 바꾸는 건 아니라는 설명이다. 멀티버스의 핵심은 다른 시간 선 위에 놓인 또 다른 우주를 상상하는 것이다. <엔드게임> 이후 4년, 마블이 땅을 일구기로 했던 멀티버스의 무대는 이야기에 무한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부여하기는커녕 혼란만 가중시켰다. 세계관이 물리적으로 확장될수록 거꾸로 이야기의 가능성은 좁아지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멀티버스에서 길을 잃은 MCU의 근본적인 문제는 구심점 없이 양적 팽창만 반복했다는 거다. 등장인물과 정보량은 갈수록 많아지는데 여기에 어떤 필연성이나 인과관계도 ‘아직’ 설정하지 못했다. 있었던 건 무수한 시도(라고 쓰고 간 보기라고 읽어야 할)와 실패뿐이다. 물론 현실에서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로 이어져 있진 않다. 하지만 이야기의 우주를 만드는 작업의 본질은 그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선으로 잇는 것이다. MCU의 패착은 늘어나는 멀티버스의 시간 선을 묶어줄 구심점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저 무대를 늘리는 데 몰두하다 보니 당최 방향을 알 수 없는 행보를 거듭하는 가운데 물리적으로 학습해야 할 정보만 늘어간다. 이게 반드시 필수적인 에피소드인지 그냥 가볍게 넘어가도 좋은 쉼표인지 구분이 안되는 관객 입장에서는 피로감이 배가될 수밖에 없다. 결국 MCU의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멀티버스는 모든 게 의미 있어 보이는 동시에 아직 아무것도 의미가 되지 않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제목처럼) 혼돈 상태다.

혼돈과 혼란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단계로 따지자면 혼돈이 좀더 원초적인 상태에 가깝다. <플래시>의 과거 배트맨, 마이클 키턴의 비유를 빌리자면 “스파게티 다발이 엉망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면 엉망진창이 되어 혼란스럽다”. 혼란에는 정리가 필요하다. 반면 혼돈은 아직 스파게티 다발조차 뽑아내지 못한 밀가루 반죽 상태에 가깝다. MCU 멀티버스의 양적 팽창은 시간 선에 따른 종적인 뒤엉킴과는 질이 다르다. 아직까진 그저 동시간대 우주를 옆으로 잡아 늘린 쪽에 가까워 텐션마저 떨어진다. 그런 가운데 현시점에서 멀티버스에 대한 하나의 활용법을 DC와 소니에서 들고 나왔다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실 코믹스를 기준으로 본다면 다중우주의 서사화는 DC가 먼저 선보였고, 이후 이에 영감을 받아 마블이 뒤늦게 스파이더버스를 내놓은 바 있다. DC 확장 유니버스(DCEU)의 마지막 영화와 마블에서 떨어져 나온 스파이더맨이 멀티버스를 제대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낸 건 자못 의미심장하다.

<플래시>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멀티버스간의 이동으로 인해 뒤엉킨 선들을 정리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다양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사건들을 모아주는 점을 찍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부채심 덕분에 부채가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부채살 무늬의 화려함은 제각각일 수 있지만 종국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사건의 점을 찍는다는 건 모든 이야기의 원출발이자 동력이다. <플래시>에선 그 점을 각기 다른 세계 선이 교차하는 ‘필연적 교차점’이라 부르고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는 바꿀 수 없고 바꿔서도 안되는 ‘공식 설정 사건’이라 부른다. 이름이 무엇이 되었건 이들이 취한 멀티버스 서사화의 핵심은 결국에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사건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문득 스치는 걱정 하나. 운명으로 일어날 일이 정해져 있다면 미래를 궁금해할 필요가 있을까. 결론이 정해진 게임만큼 시시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다행히 <플래시>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그렇게 이미 결정되어 닫힌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정해진 운명과 자유의지는 영원히 만나지 않을 평행선 위에 놓인 명제일까. 문득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의 만화 <배가본드> 중 한 대사에서 그 교차점을 발견했다. 방황하는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타쿠앙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전한다. “(우리는)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완벽히 자유롭다.” 선문답 같은 문장을 거울 삼아 두편의 영화를 비춰보니 멀티버스 서사의 한계와 가능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플래시>, 리부트라는 운명에 갇힌 영웅

<플래시>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미 결정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서사의 주요 뼈대가 된다. 상황을 복잡하게 꼬고, 여러 경로를 우회하며, 착각하도록 미끼까지 투척하지만 결국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거다. <플래시>에선 배리 앨런의 짧은 플래시백이 나온다. 곱해서 24가 되는 식의 수를 구하는 어린 배리 앨런(에즈라 밀러)는 좀처럼 문제를 풀지 못한다. 24가 되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게 이유다. 엄마는 그런 배리에게 ‘모든 일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라고 조언한다.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 원하는 길 말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은 <플래시>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연결된다. 배리 앨런의 욕망은 간단하다. 증거가 없어 억울하게 잡혀간 아버지의 무죄를 밝히는 거다. 조사관인 배리가 그토록 증거를 오랜 시간 꼼꼼하게 조사하는 건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배리가 자신에게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욕망은 확장된다. 아빠의 누명을 벗기는 것을 넘어 엄마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과거로 향한 배리는 도중에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공격을 받고 미지의 시간축으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다른 시간 선의 배리 앨런(편의상 지금부터 대학생 배리라고 명명하겠다)을 만나 좌충우돌하는 상황을 겪는 것이 주요 골자다. 현재의 배리 앨런에게 사고로 도착한 시간 선은 상관없는 곳이지만 배리는 능력도 사용할 줄 모르는 대학생 배리가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길 바라며 옆에서 돕는다. 눈앞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배리의 대의명분은 그야말로 히어로다운 명제, 이른바 정답이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동 중 자신을 공격한 존재가 밝혀지면서 배리는 혼란에 빠진다. 다크 플래시로 불리는 그 존재는 과거를 돌리기 위해 무수한 시간 이동을 반복하며 괴물처럼 변해버린 대학생 배리였던 것이다. 그제야 배리는 어떤 사건들은 수정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억지로 수정하려 했을 때 필연적 교차점이 뒤틀려 미래뿐 아니라 해당 시간 선의 과거까지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다크 플래시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했을 때 마주할 비극적 미래다. 온몸이 괴물처럼 변한 다크 플래시, 아니 대학생 배리의 모습을 마주하며 과거를 수정하려 했던 자신의 발버둥이 초래할 위험성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엄마를 되살린다는 수정 불가능한(혹은 지나치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변화를 포기하고, 아빠의 누명을 벗길 증거를 확보한다는 절충된 변화를 택한다. 물론 그 조그만 수정으로도 세계는 바뀌어버린다. <플래시>는 기본적으로 DCEU 세계관을 리부트하기 위해 영리한 설정을 제시하는 디자인처럼 보인다. 집요하게 반복하는 ‘정답이 없다’는 명제도 기존의 DCEU를 폐기하고 DCU라는 새로운 시간 선을 제시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울 것이다.

비교하자면 <플래시>는 시간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로드 무비다. 길을 떠난 인물이 길 위에서 교훈을 마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여기서 길(과거)은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배움의 장소다. 배리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목격하고 치열하게 그걸 수정해보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바꿔선 안되는 사건도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배리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 채 저항을 멈춘 건 아니다. 배리는 수정 불가능한 사건에 매달려 영원한 시간의 감옥에 갇힌 대학생 배리와 달리, 수정 불가능한 사건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아빠를 구한다는 수정 가능한 미래를 취한다. 말하자면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우회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란 곧 선택을 향한 의지다. 완벽히 결정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캐릭터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배리는 포기할 건 포기한다는 선택을 통해 자신의 욕망(혹은 성장)을 증명한다.

다만 그것이 꼭 히어로로서의 성장과 일치하진 않는다. 배리는 CCTV를 옮긴다는 선택으로 아버지를 구했다. 동시에 그에 따라 미래의 다른 사건들까지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큰 욕심을 버리고 작은 욕심을 취한 것이지만 본질은 사적 욕망이다. 그 결과 <플래시>의 말미에 벤 애플렉이 퇴장하고 조지 클루니가 새로운 배트맨으로 등장한다. 이 변화가 어떤 후폭풍으로 이어질지는 철저히 제임스 건의 밑그림에 달렸다. 그럼에도 배리를 위한 마지막 변명을 하자면, 나는 여전히 배리의 선택이 배리 자신의 의지인지 의심스럽다. 이건 배리의 의지라기보다는 DCU로 리부트하기 위한 시리즈의 의지에 가깝다. 요컨대 배리는 이미 결정된 시리즈 리부트라는 운명을 위해 여전히 개인의 욕망을 앞세우는 미숙한 영웅으로 남아버렸다. 다크 플래시처럼 시리즈와 리부트라는 운명의 감옥에 갇힌 셈이랄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구상보다 선명한 추상의 세계

그에 반해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정해진 모범답안을 보여준다. 사실 멀티버스와 관련하여 히어로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정해져 있다. 가까운 모범사례로 양자경의 멀티버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라. 세계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운명이 나를 조롱하지만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선택할 수 있다는 의지의 발현. 그렇게 자유의지란 결정된 운명론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 명확한 정답에도 불구하고 마블이나 DC가 끝내 그 길을 걷지 못한 건 개별 영화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서사보다 유니버스의 무분별한 확장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욕망에 무릎을 꿇었다고 해도 좋겠다. 캐릭터가 자유의지, 그러니까 선택을 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제멋대로 뻗어나가려는 멀티버스의 서사를 묶어주는 부채심이 될 수 있다. 구심점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서사의 표현은 자유분방하고 다채로워질 수 있지만 당장의 욕망에 휘둘린 멀티버스의 서사는 혼돈과 피로 속에 가라앉는 중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서사가 독창적이고 기발할 건 없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역시 지구–1610의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가 어떻게 탄생했고 공식 설정이 어떻게 붕괴될 위기에 처했는지 비밀을 밝히는 흐름을 따라간다. 공식 설정 사건 속에서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 되어선 안되는 소년이었다. 그는 차원이동기로 인해 마일스의 지구로 넘어온 지구–42의 방사능 거미에 물려 얻어서는 안되는 능력을 얻게 됐다. 때문에 지구–42에는 스파이더맨이 존재하지 않고, 마일스가 다른 스파이더버스에 개입한다는 건 세계의 붕괴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심지어 모든 스파이더맨들은 반드시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서장의 죽음이다. 지구–1610에서 서장은 마일스의 아버지이고 마일스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미겔 오하라(스파이더맨 2099)의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다. 마일스의 선택은 얼핏 <플래시>의 배리 앨런처럼 사적이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 명의 목숨과 세계의 운명을 저울질했을 때 언제나 대의를 따르는 것, 요컨대 자기희생은 히어로의 조건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거미에 물려서 생긴 슈퍼파워 덕분이 아니다. 거기서 그쳤다면 특이한 능력을 지닌 빌런, 아니 철없는 괴짜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교훈, 이타적이고 선한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상실과 아픔이라는 경험은 이러한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운명이 던지는 질문인 셈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설정한 공식 설정 사건이 무엇인지 모두 설명되진 않지만 아마도 이와 관련된 사건들임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자기희생이라는 선택이야말로 영웅을 영웅으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믿어왔다). 그렇다면 마일스의 선택은 히어로의 자격이 없는 이기적인 행동인가. 당연히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낸 존재, 빌런 스팟과의 대결을 그릴 3편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스파이더버스>까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마일스와 그웬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정해진 운명, 공식 설정 사건과 완전히 정해진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지다. 이건 강요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A와 B,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으니 선택하라는 건 운명을 빙자한 빌런(마치 조커처럼)이 짜놓은 판에 불과하다. 선택에 의해 바뀔 결과를 판단하는 건 신(운명)의 일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혹은 히어로)이 할 수 있는 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강요하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지는 주어진 선택지 바깥에서 드러난다. 마일스는 공식 설정 사건을 두려워하기보다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선택했고, 그웬은 마일스를 구하는 걸 선택했다(물론 공식 설정 사건이 바뀔 수 있다는 또 다른 진실을 확인한 뒤이긴 하지만). 그들 각자의 선택이 곧 자신, 자신이 있을 자리,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증명한다.

그리하여 모범답안 같은 서사를 배경으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완벽히 자유롭다”는 명제를 다른 각도에서 수행한다. 이 작품의 진가는 스토리가 이미 결정된 정답이라는 안정된 길을 가는 사이, 한계를 모르고 확장되는 표현과 다채로운 형식에 있다. 움직이는 코믹스, 영상으로 보는 만화책이라고 해도 좋을, 경계를 가로지르는 표현력을 보고 있노라면 멀티버스라는 설정이 이토록 현란하고 다채로운 애니메이션 묘사를 과시하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다. 때때로 그 표현양식이 과해 추상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인데, 거의 현대미술 아니 코믹스 미술이라 불러 마땅한 추상적인 표현들이 그 어떤 구상보다 맑고 선명하게 세계의 의지를 전달한다. 그 의지에 내 멋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다르게 볼 자유’라고 부르고 싶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추락하는 마일스를 잡는 카메라 앵글에 따라 마일스는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바로 그 카메라의 앵글을 관객의 손에 넘겨주려 애쓰는 영화다. 멀티버스가 이야기의 무대만 확장하려 몰두하는 사이 이 작품은 발상을 뒤집어 세계의 표현을 확장했다. 붕괴 중인 멀티버스(서사)에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야기가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다는 혹은 늘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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