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윤리와 폭력과 연민의 이상한 동거

현실의 외설성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한공주>의 어떤 장면에 대해

<한공주>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래, <한공주>에 대한 국내외적인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다수의 국제 영화제들에서의 수상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며, 국내에서 개봉한 지 20여일 만에 20만명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분명 이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의 주목을 끌며 더 많이 회자될 것이다. 평단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다만 이들이 호평을 전제하면서도 영화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공통적으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주목할 만하다. 많은 장점을 열거한 뒤에도 이들이 망설이는 지점은 영화의 현재에 개입하는 플래시백, 특히 성폭행 현장이다뤄지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김혜리는 같은 소재를 이야기하는 다른 영화들과 이 영화의 차별성을 섬세하게 읽은 뒤 “그날의 재현이 감독의 의도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알맞게 통제됐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한다(<씨네21> 950호). 혹은 정한석은 이 영화의 탁월한 면과 지지할 수 없는 면을 나눠 비평을 시도하는데, 그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 역시 위의 장면과 관련 있다(954호).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두개의 상충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경우, 평자로서 난감하다. 아마도 위의 두 평자 또한 그런 난감함과 대면했을 것 같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한공주>를 본 뒤 이 영화의 특별한 성취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는 대목에 대한 의구심을 짧게 덧붙인 적이 있다(926호). 한 감독이 만든 한편의 영화에서 영화가 소재로 취하는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두개의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가능한가. 그 모순을 비평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판적 지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까. 판단을 미뤄둔 채 반년이 흘렀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다시 영화를 보았다. 두 번째 보면서 나를 포함해 여러 평자들을 머뭇거리게 한 위의 장면들이, 정확히 말해 그 장면들에서 보이는 영화의 태도가 영화의 장점에 비한다면 기꺼이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얼룩도, 우리가 동의하는 이 영화의 성취에 이르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삽입된 무엇도 아니라,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하게 말해져야 할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특정 장면들(의 시선)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한공주>를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미 두명의 평자가 그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이수진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김혜리가 질문을 던진 두 장면과 정한석이 쓴 찬•반론 중 반론의 내용에 기대어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한공주가 성폭행을 당하던 과거의 현장을 재현한 두 장면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남학생들이 있는 거실을 비추던 카메라가 천천히 돌아가면 오른쪽 구석에서 폭행이 벌어지고 있다. 이수진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문제의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팬을 했던 게 아니라 공간 전체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다가가기도 컷으로 나누기도 어려우면서 거리감이 필요한 장면이었고 오해의 소지도 많아서 고민 끝에 벽에 달린 선풍기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움직인 것”(950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 공주가 쫓기듯 집을 나서기 전, 벽에 걸린 선풍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면을 기억한다. 공주의 과거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시되기 전이었지만, 좌우로 이동하지 못하고 한 지점에 멈춰 돌아가던 선풍기의 움직임과 소리는 어딘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이후 영화가 과거의 사건현장을 재현할 때 선풍기는 그 자리에 있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 선풍기는 단순히 집 안에 존재하는 물건 중 하나가 아니며, 이수진 감독의 답에서도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선풍기의 시점. 나는 이수진 감독이 고민 끝에 선택했다고 밝힌 그 시점이 이 장면에서 지나쳐서는 안 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시점에 대한 어떤 미세한 구분이 그의 대답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지금 ‘선풍기의 시점’에는 이전까지 진행되던 카메라의 시선과는 분리되거나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하지 못하는 무엇을 선풍기의 시점은 해내고 있는가? 이 시점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이 시점이 필요했을까? 감독의 말과 우리가 그 장면에서 본 것들로 약간의 추측을 해볼 수는 있다. 선풍기의 시점은 벽에 고정되어 위에서 현장을 내려다본다. 무엇보다 자동적으로 스스로 움직인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왜곡이 없는 중립적이고 자율적인 사물의 시점이며, 그 자리에 증인으로 존재하던 객관적이고 유일한 3인칭의 시선, 말하자면 신뢰할 수 있는 시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노출과 폭력 묘사”를 최소화하려는 의지, “공간 전체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 그러니까 폭력의 광경에 대한 일종의 윤리적 선택의 결과가 선풍기의 시점이라고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강변한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선풍기의 시점에 대한 위의 질문을 좀 세분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컷으로 나누지 않고 거리감도 확보하며 공간 전체를 보여주는’ 방식이 왜 필수적인 선택이었을까. 가장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으로 돌아가보자. 다큐멘터리에서, 혹은 다큐적인 성격을 지향하는 극영화에서 컷을 나눈다는 것은 피사체가 놓인 상황에 대한 조작과 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시공간적 동질성을 지켜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보존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영화들에 “금지된 몽타주”(앙드레 바쟁)는 원칙이자 때로는 윤리가 되기도 한다. 요컨대 그 예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 <동물의 왕국>류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사슴을 뒤쫓는 사자를 한 프레임 안에서 동시에 보여주고 마침내 사자에게 포획된 사슴을 컷으로 나누지 않고 포착할 때, 그 사실성이 주는 경탄할 만한 긴장감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한공주>의 문제의 장면을 말하면서 동물 다큐멘터리의 예를 드는 일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시공간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시선의 의도에는 이상하게도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숱하게 보아온 장면들의 작동방식을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한공주>에서 컷으로 나뉘지 않는 선풍기 시선은 동일한 시공간에서 잔혹한 폭력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공모자 무리의 폭력성을 체감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지켜내려는 리얼리티의 효과일 것이다. 쉽게 말해 인물들의 내재적인 폭력성과 사건의 물리적인 폭력성을 하나의 극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간과 시선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충격의 체감 차원에서라면 그 목적은 성공했다. 그런데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여기에는 이 모든 폭력성을 바라보며 작동시키는 상위의 폭력이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선풍기) 시선의 폭력성이라는 사실 말이다. 즉 이 장면에는 엄밀히 말해 삼중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는 선풍기의 시선이 폭력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긴 것 같다. 하지만 문제의 장면이 위험한 이유는 폭력의 특정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감독의 이런 판단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유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는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폭력적인 장면을 사실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의 시선과 거기 동화되는 우리의 시선에 폭력에 대한 쾌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더 현장감 있게 찍을 수 있는지 고심하는 시선을 보며 구경꾼으로서 우리는 그 리얼한 감흥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장면들은 우리의 시선으로 가치 판단할 수 없는 약육강식의 논리, 자연의 영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한공주>의 그 장면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와 다르며 같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장면이 특정 방식으로 다큐적 사실성 안에서 폭력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보여줄 때, 우리는 동물 다큐멘터리에서와는 달리 적어도 이 영화의 리얼함에서는 죄의식 혹은 분노에 가까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 잔인하다’고 경탄하는 것과 ‘아, 잔인하다’며 불편함을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어떤 기준으로, 두 감흥이 구분될 수 있을까. 그 판단의 기준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있는 것일까.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물리적으로 보여지는 폭력의 수위가 아니라, 그걸 담아내는 시선의 작동에 대해서는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약육강식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폭력을 찍을 때, 최대한 거리를 두고 사실에 밀착되게 찍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인간 사회의 폭력을 다루는 영화에서 그 세계를 재구성하고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 세계의 작동에 이미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리얼한 거리감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입이다.

그러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물어야 할 것이다. 그 장면에서 선풍기 시점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장면은 카메라의 의도적인 패닝이 아니라, 선풍기의 자동적인 움직임에 의한 것처럼 찍혔다. 마치 사건의 현장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것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한곳에 고정된 선풍기의 위치가 피사체와의 거리감을 확보한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그것은 보지 않는 척하지 이미 공간을 장악한 시선이고 죄에 연루되지 않은 척하는 전지적 시점이며, 결국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음의 시선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선풍기의 시점이 카메라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다고 느낀다. 영화는 선풍기의 시점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하고 있다. 동요하지 않는 이 시선의 의연함은 무섭다. 이 장면에 대한 의심을 더 확고하게 한 계기는 이어지는 플래시백, 즉 두 번째 문제의 장면에 있다. 동윤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나가는 이 장면에서 아이들 사이로 폭행 광경이 보인다. 우리는 그 광경을 앞선 플래시백에서 선풍기의 시점으로 이미 보았다. 다시 말해, 한번은 선풍기의 시점으로 다른 한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점으로 반복되는 이 장면은 고속촬영으로 느리게 진행되며, 시선은 마치 그 폭행 광경을 엿보는 듯한 위치에 자리한다. 감독은 여기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속되는 행동”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외설적인 호기심과 관음의 욕망은 이러한 의도를 압도하며 그 광경을 물신화한다. 동윤 아버지의 폭력적인 무심함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적 시선의 폭력성을 용인해도 될 것인가. 공주의 내면의 결들에 그토록 세심한 이 영화가 폭력을 재현하는 자신의 시선에 이처럼 지나치게 무디거나 관용적이라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가 공주의 현재를 중심으로 그 현재에 출몰하는 과거를 보여줄 때, 과거는 공주의 감정선을 따라 전개된다. 현재의 어떤 순간이 과거의 특정 순간을 불러오는데, 말하자면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공주의 파편화된 기억처럼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장면을 비롯해 현장의 폭행 장면을 담은 플래시백 또한 공주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자. 그토록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그녀가 그 순간을 온전히 기억해내는 일이 가능할까. 이 플래시백들을 지탱하는 시선은 공주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사건의 현장을 둘러보는 선풍기의 시점은 공주의 것이 될 수 없다. 영화는 학교 수업 장면에서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묻는 선생님을 등장시키며, 둘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데, 그 맥락으로 말하자면, 위의 플래시백들은 집단성폭행이라는 사건의 사실에 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주가 기억하는 진실에는 닿아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가 그 장면들에서 본 폭력의 서사는 정작 공주를 소외시킨다. 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말할 권리는 오직 한공주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이 장면을 관장하는 외적인 시점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 장면의 권리는 오직 한공주에게만 있다고 말한다면, 그 기억은 어떻게 재현하는 것이 온당한가. 한공주의 트라우마를 그녀 자신의 시점으로 재구성하면 될 일인가. 하지만 여전히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물음들이 남는다. 이를테면 카메라는 서슴없이 그녀의 시선이 놓인 자리에 가도 될 것인가. 그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물질화될 공포, 두려움, 고통의 시선을 물신화하지 않으며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수많은 스릴러물에서 피해자의 공포가 물신화되어 장르의 또 다른 쾌감으로 전환되는 경우들을 알고 있다. 피학적 주체의 두려움의 시점을 다른 무엇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 자체로 체감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만약 가능하다 해도 그러한 체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한 체감으로 연민과 공감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달리 말해 피해자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그러니까 피해자의 고통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 될 때가 더 많다. 영화가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영화적으로 반복 재현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한공주>로부터 너무 멀리나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가장 극단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더이상 스토리텔링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공허함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고 “기만적으로 엮어내는” 것이며 허구의 연금술이 작동한 결과 생성된 이야기는 “결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로버트 스탬,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 아무리 관습적인 서사의 구조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된 이야기 역시 무언가를 전달하는 또 다른 서사라는 점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과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 앞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일수록 그 텅 빈 심연을 은폐하기 위해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왜곡한다. 2014년, 4월, 도무지 믿기 어려운 국가적인 참사 앞에서 난립하는 말들의 향연이 그 예가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서사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서사의 진정성을 논하지만, 그 서사가 자기비판과 반성, 미안함을 토로하는 경우에도 모든 서사는 서사화의 욕망, 결국 타자가 아닌 자신을 설명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목격한다. 타자를 2인칭으로 상정하거나(“너희들”로 시작하는 수많은 편지와 시들), 타자의 자리에 서서 1인칭으로 말하는(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모아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기사들) 방식이 3인칭의 냉정하고 건조한 글보다 더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으며 그 형식의 미학이 때로는 지나친 자기연민과 기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사 앞에서 질문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형상화된 재현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묻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무엇을 그 서사에 투사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한공주>를 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고통을 감내하는 한공주에 대한 죄의식과 연민과 관련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들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이 이 영화에 투영되었다는 사실, 하지만 충격이 분노와 연민의 서사로, 결국에는 망각과 무감함으로 전환되곤 한다는 점은 길게 지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좀 흥미로운 반응을 접했다. 젊은 여성 두명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토할 것 같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소원>처럼 힐링이 가능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속았다”라는 것이다. 그 불쾌함이 폭행사건 현장의 장면을 향한 것인지, 한공주라는 인물을 향한 것인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향한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후자의 감상이 분노와 연민을 표하는 감상보다 더 솔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할 것 같은 불쾌함은 그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공포가 연민을 압도했다는 증거일 텐데, 이들에게 그 공포는 <소원>에서와 달리 끝내 서사로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들의 환상에 이 영화는 답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재현 불가능한 것들 앞에서 스토리텔링을 믿지 않고 침묵과 생략을 택하거나 서사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묻는 것 외에 달리 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결국 <한공주>에 대한 나의 의심은 하나의 물음을 향하고 만다. 이 영화는 왜 사건의 재현을 필요로 했을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주의 현재만으로도 우리는 그녀의 깊은 상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현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위선만으로도 평범해 보이는 이들 모두가 공모한 폭력의 구조와 모순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사건 현장을 반복 재현하지 않아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면, 사건의 이미지는 잉여이며, 그 잉여가 무엇에 복무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실제 성폭행 사건의 현장이 찍힌 영상을 삽입해서 재생했다면 그 다큐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다큐에서는 안 되는 장면이 허구에서는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허구에서만 가능한 역할은 무엇인가? 폴란드의 거장 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선택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극영화로 관심을 돌렸다. 그 이유는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허락도 없이 파고들어가는 (다큐의) 외설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현실의 외설성을 돌파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그 순간을 허구로 만드는 것이며, 그 위장된 허구 속에서 오히려 진실을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현실의 외설성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거기 저항하기 위해 그가 허구를 택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의 견해를 <한공주>에 적용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허구적 재현은 현실의 외설성을 모방하고 반복한다.

이 물음과 관련해 말해야 할 한 장면이 남았다. 공주가 떠난 뒤, 반친구들은 사건의 현장이 찍힌 영상을 보고 있다. 영화는 그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공주의 울부짖는 소리와 그걸 바라보며 충격에 사로잡힌 아이들의 얼굴만 비춘다. 컴퓨터에서 재생되고 있는 그 동영상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상한 선택이다. 정한석이 지난 비평에서 지적했듯, 우리는 이미 그 현장의 영상을 플래시백으로 보지 않았는가. 감독은 지금 아이들이 동영상을 보는 행위, 나아가 그들의 시선을 경유해서 그 영상을 보는 행위를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그 판단의 대상에 영화 자신의 시선은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본 사건현장을 재현한 장면들, 그 참혹한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는 선풍기의 시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끝내 두 시선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 이 영화에 동의를 표할 수가 없다.

말하기 방식의 문제인가, 말하기 자체의 문제인가. 이 영화를 보며, 그리고 최근 한국의 처참한 상황 속을 떠다니는 말들을 보며, 후자를 택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말하기 자체의 저열함을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나 역시 결국은 <한공주>에 대해 말하기를 택했다. 이야기를 떠날 수 없는 우리는 “재현할 수 있느냐 또는 재현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목적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재현 양식이 무엇이냐”(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말해질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공백을 채우는 대신, 우리의 실패를, 무능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찾는 것, 창문에 보이는 내용이 아니라, 창문 자체로 시선을 돌리는 일에 대해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