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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스트우드는 이라크전을 똑바로 보았나

미국인 내부의 관점에서 찍힌 <아메리칸 스나이퍼>

<아메리칸 스나이퍼>

“만약 후세인 정권이 정말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후세인이 극단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책임감과 자제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즉, 만약 이라크 군대가 뉴욕을 폭격하고 워싱턴을 포위한다면) 우리가 부시 정권에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수천발의 핵탄두를 포장에 싼 채 보관하기만 할까? 생화학무기들은? 탄저병, 천연두, 그리고 신경가스들은? 미안하게도, 웃음이 터져나오려 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품을 수 있는 미국과 이라크 전쟁의 본질을 통쾌하게 요약하고 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에도 오랫동안 이라크 반군과 전쟁을 치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 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해 전설이 된, 그럼으로써 미국에서 영웅이 된 크리스 카일의 실화를 옮긴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함을 안긴다. 이스트우드 영화에 대체로 우호적인, 그의 실패작들조차 좋아하는 팬으로서도 그렇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다가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를 다시 집어들고 죽 읽었다. 만날 수 없는 평행선, 뭐가 옳고 그른지에 관한 윤리적 동요를 가려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인 내부의 관점에서 찍었다.

이스트우드가 오랜 기간 만든 서부극의 진화 양상을 떠올리면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일방적인 관점은 이상하다. 1970년대에 만들었던 이스트우드의 수정주의 서부극에서조차 미국인들의 적이 이렇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무법자 조시 웨일즈>에 나오는 인디언들은 이스트우드의 무법자 캐릭터와 친구가 된다. 그에 비해 이 영화는 주인공 크리스 카일의 시점에서 보이는 것을 설정하고 그 이상 크게 나아가지 않는다. 크리스 카일은 세상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자신들은 선의 편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의 훈육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이라크인들에게 갖고 있는 관점은 그들이 야만인들이라는 것뿐이다. 실제로 영화에서 그가 이라크인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도 ‘야만인’이다. 이것은 그가 상대를 대할 때 어떤 윤리적 동요도 없었던 인물임을 드러낸다. 크리스 카일과 결혼하는 타야는 카일과 데이트할 때부터 자주 카일에게 전쟁에 대한 생각을 묻지만 카일의 생각은 투명하다.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인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인물이며 조국을 위협하는 야만인들을 무찌르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원죄처럼 떠안고 있는 인디언 학살의 역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세상 인식이다.

카일은 실제 그런 사람일 수 있다. 카일이 쓴 자서전을 보면 그의 캐릭터가 훨씬 더 일방적이고 자신만만한 쪽에 치우쳐 있다고 한다. 이스트우드는 왜 이런 인물에게서 문제적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카일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카일은 조금씩 이분법의 도덕관으로 단련된 내면이 무너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초반 카일은 테러에 동원된 어린아이를 사살할 때 큰 동요를 보이지 않으나, 후반에 이르러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총구 과녁에 잡힌 아이가 무기를 집어들지 않기를 바란다. 카일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망설인다. 이것은 그의 윤리적 성숙일까. 영화는 공식적으로는 160명을 사살했고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100여명을 더 사살한 이 전설의 저격수가 폭력으로 정의를 지킨다는 미국적 영웅의 서사를 따라가는 한편, 그 자신의 내면이 트라우마로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게 얼마나 보편적인 깊이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미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간 전쟁영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캐스린 비글로가 <허트 로커>에서 묘사한 것은 전쟁에 중독된 인간이었다. 폭탄제거반으로 근무했던 주인공이 평화로운 미국에서의 일상에 적응할 수 없는 것은 시청각이 제한된 전쟁터에서 수행하는, 죽음의 순간과 종이 한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 절체절명의 공포감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그 공포를 두려워하지만 그 공포가 없이는 일상적 삶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주요 인물들은 마약보다 더 심한 유혹을 느끼며 다시 전쟁터로 간다. <허트 로커>에서의 중동인들도 얼마간 타자화돼 있지만 그들은 전쟁터의 적으로서만 존재한다. 이는 조금 더 건조하게 저널리즘적 사실성에 충실했던 <제로 다크 서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서 오사마 빈 라덴은 타깃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오히려 이 두 영화에서 강조된 것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현지 민간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모습들이다. 그들은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때는 그저 전쟁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의 무표정이 때로 공포를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표정의 이면일 수 있다는 걸 관객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그런 괄호치기 접근법이 아예 배제됐다.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폭탄을 든 어린아이처럼 현지인들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미군에 밀고한 가족의 아이 다리를 드릴로 뚫어 고통을 준 다음 머리통을 뚫어 죽이는 테러리스트들의 잔인함이 시연된 뒤 관객인 우리가 현지인들을 보는 관점은 훨씬 일방적인 것으로 흐른다. 그다음에 사건에 등장하는 현지인들에 대한 묘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밀고자가 아니면 적과 내통하고 있는 자, 심지어 크리스 카일의 강력한 적으로 설정된 적의 저격수 무스타파와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영화는 숨 고를 순간을 주고 묘사하는 걸 기피한다. 카일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있는 무스타파의 아내 모습이 화면에 들어오지만 카일 가족의 모습과 비교하면 평면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에 그칠 뿐이다. 카일은 임무 수행 중에도 곧잘 아내와 전화 통화를 시도하며 영화 말미에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자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작별인사를 수화기에 남긴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젠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자신만만했던, 전쟁기계와 같았던 남자의 궁극적 변화라고 하기엔 뭔가 미심쩍다. 그의 고통과 등가의 것이 상대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안관 의식으로 대변되는 미국식 정의의 위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실존 인물의 편에서 자신의 시각을 입히지 않는 대신 이 미국적 영웅의 내면이 그렇게 일방적인 것으로 균일하진 않았음을 보여주는 데에서 멈추려고 했던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정체에 망설임을 보이는 순간은 희미하게 영화에서 감지된다. 고향에 돌아와 아들과 카센터에 들렀을 때 그는 자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고백하는 한 참전 병사와 만난다. 자신과 아들 앞에서 대놓고 헌사를 늘어놓는 그 행동에 카일은 적지 않게 당황한다. 그런데 이런 망설임과 약간의 수치심이 전쟁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이어져 있는지는 여전히 미심쩍다. 카일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전쟁터에 있는 듯한 과중한 긴장을 느끼는 자신의 상태에 당황한다. 그 긴장을 그는 전쟁터에서 동료 병사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자신의 보안관 의식과 연결지어 생각한다. 그 때문에 그는 일상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전쟁터에 나간다. 그런 그의 보안관 의식이 붕괴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곁에 있던 친한 동료 병사들의 죽음을 겪으면서부터다. 그는 동료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전쟁터에 가지만 동료들은 죽는다. 그의 아내 타야의 말대로 그는 이 전쟁을 책임지고 집전할 수 없다. 그는 이 전쟁터에 들어간 플레이어일 뿐이고 그의 과한 도덕적 자의식은 동료들의 죽음 앞에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이스트우드는 실존 인물 크리스 카일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 자신도 희생자였다는 프레임을 만든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크리스 카일의 삶의 명분을 지탱하는 것은 전쟁으로 물리적 외상을 입거나 심리적 내상을 입은 참전군인 출신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그는 그 일에 퍽 자부심을 갖는 듯 보이는데 이것 역시 보안관 의식의 발로이다. 그는 뼛속까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심지어 그가 집 안에서 가족들과 장난을 칠 때도 그는 아내에게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옷을 벗으라고 농담하거나 어린 딸에게 늑대 흉내를 내며 까부는 인물이다.

카일은 원래 자기가 사는 삶에 큰 의문을 품지 않는 인물이었다. 군인이 되기 전 카일이 로데오 게임에 나가 실력을 과시하는 카우보이 생활을 할 때의 장면에서, 카일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외간남자와 통정하는 동거녀의 모습을 보고도 담담하게 이별할 수 있는 건 그가 멋있다고 여기는 삶의 규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총 쏘기에 능했고 함께 사냥을 나갔던 아버지로부터 훌륭한 사냥꾼이 될 것이란 칭찬을 듣는다. 그는 나름 미국적 삶의 규준에서 훌륭하고 올바른 것이란 규범에 자신이 적합한 인물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카일과 달리 어렸을 적부터 유약했던 그의 동생은 다르다. 영화에 등장하는데도 이상하게 비중이 없는 이 동생은 형과 마찬가지로 이라크전에 참전했지만 형과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자리에서 미국을 혐오한다고 말한다. 영화의 흐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이 짧은 언설은 기이하다. 겉보기에도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동생의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들은 카일의 멍한 표정이 반응화면으로 잡히긴 하지만 이후의 사건 전개 속에서 동생의 존재는 완벽하게 지워진다. 카일은 동생처럼 트라우마로 망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의 구원자를 자처한다. 자신을 진찰한 의사에게서 그가 받은 처방은 상이군인들을 만나보라는 것이었고 그는 새 역할에 잘 적응하며 후속 삶을 이어갈 것처럼 보인다.

물 흐르듯이 묘사하는 전투 장면과 전쟁터에서 돌아와 보내는 가족과의 삶이 병치되면서 이 영화는 여하튼 보안관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남자의 삶을, 그 남자의 내면에 있는 피로감과 두려움을 슬쩍 흘리면서 묘사한다. 어느 쪽으로도 단정지을 수 없는 이 남자의 삶을 따라가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주 살짝 미국식 영웅 서사에 균열을 낸다. 아마 이것 때문에 이 영화가 미국 내에서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겠지만 이 애매한 영웅 서사의 관점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영화 말미에 무스타파와 카일이 겨루는 장면에서 카일이 쏜 총알이 총신을 벗어날 때 카메라는 그 총알의 궤적을 따라간다. 총알은 무스타파가 또 다른 미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그의 머리에 맞는다. 영화에는 불과 몇초밖에 나오지 않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장면은 이 애매한 미국 영웅 서사에 강조점을 찍는 듯이 보였다. 카일은 다른 병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안위가 위험한 상황에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구원부대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고 카일이 방아쇠를 당김으로 인해 카일과 그의 동료들은 몰려드는 적들에 거의 죽을 뻔한다. 그들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사막의 거센 모래폭풍이었다. 모래폭풍으로 인해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클라이맥스의 전투 장면은 외부인에게는 명백히 비도덕적인 전쟁이었지만 미국인에게는 정의의 집행장이었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 영화의 애매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 같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적인 명제는 전쟁의 원인까지 끌어안은 성찰이 전제돼야 호소력이 있다. 이스트우드는 보안관 의식으로 대변되는 미국식 정의의 위선에 대해 직설로 들어가는 것을 여전히 망설인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며 당혹감을 느낀 적은 드물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관대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전쟁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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