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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의 영화비평]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찰영화가 이입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인물을 살피다

<극비수사>

경찰은 조폭과 함께 한국 상업영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직업 중 하나다. 수많은 영화들이 경찰을 원한다. 폭력에 대한 명분 있는 이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충무로에서는 격투와 추격, 스릴과 서스펜스를 좇는 데 경찰만 한 직업을 찾기 쉽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심심하면 등판시키는 로봇이며 공룡들에 비해 한국의 경찰관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간판급 선수다. 현실도 경찰을 원한다. 2012년 현재 국내 살인 발생 건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멕시코, 에스토니아, 미국 등에 이어 6위다. 더 암울한 사실은 2001년 이후 10년 동안 대다수 유럽 국가들에서 5대 강력범죄 발생이 꾸준히 줄어드는 사이 우리나라는 되레 84.5%가 늘었다는 점이다(한국경찰연구학회). 이 가운데 강간범죄는 1.8배나 늘었다. 한국영화에 경찰이 안 나올 이유보다 나올 이유가 더 많다고 봐도 될 정도다.

아이살리기 vs 실적올리기

역설적이지만 현실적-영화적 이유로 국내 현실과 영화 사이에는 격차가 벌어진다. 무장 갱단과 맞서야 하는 나라의 경찰들과 달리 우리 현실에선 영화 같은 액션 활극이 벌어지는 일이 드물다. 한국 형사가 영화에서처럼 범인의 흉기를 날렵하게 피한 다음 메치기로 제압할 일은 거의 없다. 대개의 국내 범죄자들은 총 든 경찰과 맞서기보다 도주하는 쪽을 택하거니와, 경찰 앞에서 칼 따위를 꺼내봐야 득 될 게 없음을 안다. 주인공이 동료 없이 홀로 범죄 현장을 찾았다가 위기를 맞는 숱한 형사영화들의 설정은 현실에선 엄중한 규정 위반으로, 한국 경찰공무원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경찰도 아닌 검사가 범인 검거 현장에 나가는 장면이 있다면 그건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영화적 허용일 뿐 현실에선 없는 일이다. 행여 현장에 발걸음이라도 하면 경찰의 작전에 방해만 줄 뿐이라는 걸 검사 스스로 안다. 검사가 용의자와 격투라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면 그냥 판타지영화라 불러도 무방하다. 한국 범죄-수사 영화에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부질없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영화적 설정과 영화 속 비논리는 별개의 문제여서, 설정이 현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한 영화의 가치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영화를 보며 폭력의 공동 소비자가 되는 우리가 어떤 경찰 캐릭터에 이입하는가 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최근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 속 형사들, 즉 이입의 대상이 어떤 인물인지를 짚어보면 현재의 시대상과 더불어 <극비수사>가 점한 좌표를 읽는 데 도움이 될 터다.

<부당거래>(2010)의 광역수사대 팀장 최철기(황정민)는 경찰 상부로부터 사건 해결을 위한 대국민 사기극을 제안받고 이를 수행한다. 왜곡되고 뒤틀렸지만 어쩔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가장으로 살아남기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와중에 충직한 부하를 죽이기에 이른다. <끝까지 간다>(2014)의 강력팀 형사 고건수(이선균)는 아내 없이 딸을 키우며 유흥업소 업주들로부터 받은 뒷돈을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다닌다. <악의 연대기>(2015)의 형사팀장 최창식(손현주)은 승승장구하지만 자신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덮으려다 미궁에 빠진다. 최근 몇해 사이 나온 한국영화의 경찰관 주인공들은 대개 능력을 인정받는 형사이고 책임이 무거운 아버지이며, 비리를 저지른다. <극비수사>의 공길용(김윤석)은 이 흐름 위에 있다. 이전의 경찰영화 주인공들이 피의자를 마구 때리거나 법 테두리 밖에서 수사를 벌이는 경우는 흔했지만 대놓고 돈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도 “관행으로” 돈을 받은 공길용 형사를 우리는 응원한다. 공무원이 돈을 받는다는 것은 돈을 주지 못하는 처지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을 뜻한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극중 유괴를 당한 은주네 집은 부산의 수산 재벌로, 아이를 찾기 위해 경찰관서와 언론 기관을 가리지 않고 뇌물을 뿌린다. 은주가 돈 없는 집 딸이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는 점 또한 우리는 안다. 부패 관료나 간신과 관련된 역할을 주로 맡아온 배우 송영창이 은주 아버지로 분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실화를 충실히 취재해 만든 이 영화는 한편으로 돈의 쓰임새와 관련해 몹시 무심하며, 한편으로 더없이 현실적이다. <극비수사>를 볼 때 <부당거래>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가 뒤섞여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 형사가 토끼 같은 자식 셋을 키우는 아버지임을 수시로 보여주는 영화는, 함께 사건을 해결한 도사 김중산(유해진)의 가족과 나들이 나온 공 형사가 좋은 아빠 노릇을 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민간인 사업가인 은주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특별수사팀을 꾸릴 만큼의 돈이 있고 순경으로 경찰 일을 시작한 공 형사는 경무관까지 승진할 정도로 능력이 있다(이게 다 실화다). 그리고 어쨌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은주 아버지가 아이를 찾기 바라며 공 형사에 이입한다. 중산은 사건을 해결한 뒤 곱게 잠든 딸의 얼굴을 보며 도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한다. 영화의 처음으로 거슬러가보자. 동요 <옹달샘>이 울려퍼지며 시작한다. 깊은 산속 옹달샘은 누가 와서 먹을까? 노래의 앞소절이 하는 질문은 누구(who)냐는 건데, 뒷소절 답변은 무엇을(what)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토끼(who)인지 여우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세수하러 왔다가 물(what)을 먹었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곽경택 감독이 밝히고 있듯 “과실 따먹기”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지만, 앞소절에서 범인이 누구냐고 질문한 뒤 뒷소절로 갈수록 수사의 목적이 아이를 살리는 것인지 아니면 범인을 잡아 실적을 올리는 것인지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어느 쪽을 목적 삼았느냐에 따라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이입 여부를 가늠해보는 것은 물론이다.

유괴범죄의 특성상 범인을 쉽게 잡으려면 공개수사로 진행해야 하고 아이를 살리려면 극비수사로 가야 한다. 올바른 목적을 위해 추진되는 극비수사의 과정은, 경찰국장과 언론사를 상대로 한 거액의 뇌물이 건네져야 하는 부정한 하위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자. 이 영화는 1978년의 실제 사건을 충실히 반영했고 2015년의 관객은 현실적으로 이입하고 있다. <극비수사>는 개봉 일주일 만인 6월24일 현재 159만여 관객을 불러들이며 흥행 중이다.

어떤 캐릭터에 이입하는가

결론은 없고 질문만 있는 이 글을 쓴 이유라도 밝히는 게 좋겠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밈(meme) 개념을 내놓은 것은 결국 인간 유전자(gene)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정의 하나였다. 비유가 아닌 실재하는 구조로서 밈은, 모방으로 전이되며 뇌에서 뇌로 복제되는 문화적 유전자 단위다. 밈의 작동 단계에서 인간의 뇌는 대상을 향해 공감하며 이입하는 과정을 거친다(<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보고 나온 관객이 난폭운전을 한다면 조금 낮은 단계에서 이 과정을 밟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밈 구성요소의 배열 순서, 즉 염기서열(sequence)이 결정된다. 유전자 염기서열에 따라 피부색이나 성격 같은 인간의 특성이 정해지고 영화에서 신(scene) 구성요소들이 충돌하며 배열되는 시퀀스가 영화의 성격을 규정한다. 밈의 시퀀스가 어떻게 배치되느냐는 우리의 문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느냐를 결정하게 된다. 생존기계로서 인간 개체 속 밈이 어떤 내용에 공감하고 어떤 캐릭터에 이입되면서 자연선택 과정을 거치는지를 관찰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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