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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의 영화비평] <내셔널 갤러리>와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포착한 신체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을 다룬 다른 다큐멘터리와 비교해 확연한 형식적 차이가 있음을 짧게나마 ‘<내셔널 갤러리> 프리뷰’(<씨네21> 1069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때 구체적인 작품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혹자는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이름을 비교 대상으로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내셔널 갤러리>가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를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적절한 비교 대상을 선별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셔널 갤러리>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작품과 그저 맥없이 비교하는 데 그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를 재현하는 것 역시 현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소쿠로프의 방식이라면 와이즈먼은 철저히 현재를 기록하되 그것이 과거와 상상적 연결점을 갖도록 만든다. 한쪽을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것이 낫다거나 옳은 방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는 와이즈먼과 다른 감독의 방식을 비교 대조하는 대신에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작품 세계에 한정해 다른 작품 속 특정 부분들과 <내셔널 갤러리>가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가를 다루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1960~70년대 완성된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초기 다큐멘터리는 공공기관 5부작으로 불린다. <티티컷 풍자극>은 한때 미국에서 상영이 금지되는 등 그의 작품은 공공기관에 대한 폭로나 비판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서 나의 이목을 끌었던 건 공간 속에 붙들린 인간의 신체들이었다. 특히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티티컷 풍자극>을 보고 난 뒤 어떤 의지나 저항의 기미 없이 무력하게 내맡겨진 벌거벗은 인간의 몸이 깊이 각인되었다. <병원>에서 의사의 점검과 판단을 기다리는 몸과 스스로 가눌 수 없게 된 응급환자의 몸에서 느껴진 것은 적어도 특정 공간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권한을 위탁받은 타인이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몸을 판단하거나 관리한다는 사실이다.

공공기관에서 예술기관으로 그 소재를 옮긴 듯 보이는 2000년대 후반 이후의 몇몇 작품은 와이즈먼이 인간의 몸에 주목해왔음을 다시금 증명하는 것 같다.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의 모습을 담은 <라 당스>, 최고급 누드쇼를 표방하는 파리 크레이지 호스팀을 담은 <크레이지 호스> 등에서 와이즈먼은 훈련된 인간의 신체, 특히 예술적인 신체에 주목하는 듯 보인다. 와이즈먼 초기작에서 인간의 몸은 타인의 지배하에 놓인 무력한 것으로 드러났다면 이 작품들에서 몸은 일단 타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몸처럼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통제 방식이 달라졌을 뿐 예술적인 신체 역시 타인의 관리와 선택하에 놓였음은 여전하다. <라 당스>에 등장한 무수한 연습 장면 중 한 장면에서 코치는 무용수가 방금 했던 동작을 따라하며 “이렇게 하는 건 너 자신을 위한 것”, 그러고 나서 조금 전 동작에서 미세하게 교정된 자세를 취하며 “이건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술적인 몸은 자기만족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관찰자로서의 코치는 자기만족적 포즈와 타자의 만족을 위한 포즈 사이의 얇은 차이를 감지해 이 사이의 폭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크레이지 호스>에 등장한 한 토막의 대화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주체성의 모호한 위치를 드러낸다. 공연 관계자가 여성의 입장에서 본 크레이지 호스 쇼의 장점을 말하면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성을 즐길 때 득을 보는 것은 남성’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이 말은 본래의 의도와는 별개로 예술적인 몸이 처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준다. 감시와 통제 속에 놓인 무력한 몸이라는 관계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과거의 통제 방식이라면, 예술적인 몸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오늘날의 통제 방식은 통제를 체화하면서 그것이 타자에게서 오는지 자신의 선택인지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교묘하다. 타자의 통제를 자기 통제로 뒤바꾸는 것은 상상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세뇌와 자기암시의 힘이다. 크레이지 호스 단원들이 에로티시즘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타인의 시선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때의 주체성은 이중적이고 모호하다.

‘몸’을 중심에 두고 <내셔널 갤러리>를 볼 때 드러나는 것은 일상적인 몸의 곤혹스러움이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누드 크로키 실습 장면에서 누드모델의 몸은 철저히 관리된 예술적인 몸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몸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자세를 고수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몸의 상태와 많은 이들이 모델의 몸을 주시하고 있다는 상황으로 인해 몸은 비일상적이거나 혹은 예술적인 몸으로 보일 뿐이다. 카메라에 비친 교육생들의 그림 속 모델의 몸은 실제 일상적인 모델의 몸과 달리 예술적인 몸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드러난 차이는 그림 자체가 지닌 가공하는 성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찰자가 지닌 환상의 폭을 반영한다. 이제 실제 몸은 환상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다리일 뿐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거나 철저히 소외된다.

몸이 소외된 자리에 불려오는 것은 얼굴이다. 영화 속에서 한 연구자는 벨라스케스가 뒤돌아 모로 누운 비너스를 그리면서 왜 작은 거울을 삽입한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거울 속의 그녀는 언뜻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거울의 각도상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자신을 보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 육체는 예술적인 신체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나의 몸은 타자의 시선하에 놓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 역시 거울을 통해 타자를 본다. 그러니까 거울 속 얼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자기만족을 가장하는 동시에 자신이 타자를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오히려 타자의 통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의 표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울 속의 비너스> 속의 신체는 예술적인 신체의 모호한 이중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거울 속 얼굴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이제 기관에 이임된 시선의 권력이 아닌 일상화되고 개인화된 시선의 차원을 짚는다. 물론 여기에서도 감독이나 코치 등 우위에 놓인 시선이 존재하지만 이들은 단지 개인들의 대표자 격으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와이즈먼은 이제 시선에 대응하는 신체의 자리에 얼굴을 놓는다. 특히 명화 속 얼굴과 관람객의 얼굴이 마치 서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편집된 몽타주가 인상적이다. 와이즈먼은 예술적인 얼굴과 일상적인 얼굴이 서로를 바라보게 하는 가운데 시선하에 놓인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해체한다. 관찰자적이고 개입하지 않는 영화에서 와이즈먼은 연출된 것으로 보이는 발레 장면을 극의 말미에 삽입한다. 이 장면에서 육체는 그림 속 박제된 육체를 해방하는지, 그 역시 그림처럼 속박되고 마는 것인지 모호하다. 다만 와이즈먼은 그 뒤에 얼굴의 몽타주를 덧붙인다. 마치 화면 밖을 꿰뚫을 듯 카메라와 마주한 얼굴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관찰자, 특히 카메라 뒤의 관찰자인 와이즈먼의 시선을 구원하는 것만 같다. ‘그래, 네가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도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그의 카메라와 시선을 맞출 리 만무했던 무수히 많은 지나간 얼굴들과 이런 상상적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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