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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진이 '춘천, 춘천' '겨울밤에'에서 계절과 풍경을 관계의 우화로 조형하는 방식에 대해

의식의 텍스처

중년의 부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는 택시 안에 있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구불구불한 곡선의 도로 위를 달리며 택시 기사와 흥주는 30년 전 흥주가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회고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1988년, 서울에서는 올림픽이 열렸고 청평사 근처에서 소라를 팔았던 노점상들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모두 철거를 당했노라고 택시 기사는 말한다. 택시 기사의 이 말은 부부를 인도하여 3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게 하는 발화점이다.

그때 은주는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뒤를 이어 정체불명의흰색 밴이 위협적으로 클랙슨을 울리더니 택시를 앞질러 간다. 외견상 피상적이고 우연한 이 도입부의 삽화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메아리를 되짚어가는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메타포이다. 소거당한 기억과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차를 돌려 되감기는 시간(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판본에는 택시가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개봉 버전에서는 삭제되었다), 사랑이 시작된 시간의 말, 감정, 기억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유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

<겨울밤에>는 장우진의 전작인 <춘천, 춘천>(2016)과 여러 특징을 공유한다. 세계의 축도라도 되는 듯 춘천의 제한된 장소들을 무대로 전개되는 여로형 플롯이라는 점, 중년기와 청년기의 관계 특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지각과 유머, 섬세함, 운율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 등 유사점이 많다. 그곳엔 청평사가 있고,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막배를 놓쳐 갇힌 커플의 여정이 교차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춘천, 춘천>의 서사는 중년 커플과 청년의 스토리가 두 부분으로 나뉘지만 <겨울밤에>는 한쪽(중년)에서 다른 쪽(청년)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이며 청년과 중년 부부의 차이를 단계적으로 비교할 수 있도록 짜였다. 이때 플롯은 일종의 시간 여행으로 기능한다. 미로처럼 펼쳐지는 엄동설한의 야행을 통해 두 커플이 작은 반경의 장소들 안에 갇히고 미묘한 차이를 두고 교차한다.

핸드폰이 그녀의 영혼이라도 되는 양 은주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찾는다. 은주의 반응은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걱정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그녀에게 있음을 암시한다. 대체될 수 없는 물건에 대한 애착은 은주와 흥주 사이에서 사라진 것들의 가치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송학가든 민박집을 에워싸고 주변을 맴돌았던 젊은 커플과 은주는 암자에서 다시 교차한다. 은주가 흥주와의 표류하는 관계에 염증을 느끼는 반면에 생기가 도는 이 커플은 사랑의 판타지에 빠져 있다. 식당의 CCTV를 확인하는 신에서 폐쇄회로 이미지는 젊은 군인(우지현)과 그의 여자 친구(이상희)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했다가 은주와 흥주의 이미지로 데칼코마니를 찍어낸 것처럼 교체된다. 얼어붙은 시간의 메타포라 할 수 있는 CCTV의 이미지는 장우진이 시간의 왕래를 암시하는 방식을 말해준다.

<겨울밤에>의 서사 경로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밤중에 깨어난 부부가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던 시기의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각자 여정에 나서는 동안 은주와 흥주의 행로는 미세하게 갈라진다. 분열적인 양상을 띠면서 남편과 아내는 별개의 영혼 탐색을 위해 각자의 겨울밤으로 보내진다. 젊은 커플과 중년 부부의 연결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전반부를 채우는 여정 동안 흥주는 군인과 그의 여자 친구를 한 장소에서 동시에 마주치지 않는다. 흥주는 황량한 청평산장 노래방에서 취기에 겨워 노래를 부르는 동안 옛 여자 친구 혜란(김선영)을 만난다. 그는 혜란을 소환하여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에 대한 무의식적 실현을 취중의 시시덕거림으로 합리화하려 한다. 혜란은 미친놈처럼 뒤를 쫓아오는 흥주를 피해 도망하다 뒤늦게 그를 알아본다.

여기에 장식을 위한 공간은 없다. 프레임 왼쪽 구석에서 혜란과 담배를 나누어 피울 때 젊은 군인이 프레임을 가로지르고, 혜란이 사라진 뒤 흥주는 카페 창문 밖에서 혼자 남겨진 젊은 여자를 목격한다. 순간 창문은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로 바뀐다. 흥주가 술로 헛헛함을 달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은주는 자신의 애통함을 청년 커플과 나눈다. 먼 과거의 유령을 만난 것처럼 은주는 이젠 불가능할 것 같은 순진한 로맨스를 목격한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랑이 부활했는가? 흥주가 젊은이들을 스칠 때 그들이 혼자인 것과 달리 은주가 소환해낸 두 사람은 항상 함께 있다. 그들은 젊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벅차오르는 반면 은주는 나이가 많고 실의에 빠져 있다.

서사 전반에 걸친 은주와 흥주의 평행한 액션 라인은 그들의 혼란스러운 의식을 표현한다. 두 사람은 외계의 풍경을 걷고 있고, 시간은 그 흔들림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물들은 서로에게 알려진 존재들인가? 뒤틀린 플롯은 어떤 속임수를 쓰는가? 당연히 영화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데 관심이 없다. <겨울밤에>는 여러 가지 현실을 겹쳐놓고 하나를 다른 하나의 반영으로 제시한다. 그들이 목격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의식의 투사이다. 중년 부부는 얼음처럼 갈라지는 피곤한 관계가 지속되는 잉여의 시간을 통과하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녹아내리는 밤 자신의 거울상을 찾아 그들이 걸어온 길을 재평가하게 된다. 30년 전, 겨울의 청평사는 사랑의 시원지였지만 깊은 밤의 데이트를 뒤덮은 기억들은 오래된 사찰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 이해처럼 과거의 유물에 가깝다.

남자는 암자로 돌아가지 못한다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플롯은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관객은 50대 커플과 20대 커플이 서로의 거울상인지, 기억의 재현인지, 기만적인 의식의 소산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늦은 밤 방랑자들이 지그재그의 흐름으로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 과거와의 연결은 부분적으로 상충된다. 하지만 이같은 쟁점에 대한 판단이 중요한가? <겨울밤에>는 비선형적인 시간과 공간의 영화적 배치를 위해 특유의 재귀적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감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시공간의 연결은 기억의 한계에 의해 변경된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돌아가보자. 청평사에 두고 왔을지도 모르는 물건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회귀한 부부는 닫힌 매표소 창구 안의 직원으로부터 제지를 당한다. 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은주가 언덕길을 오르자 흥주는 역정을 낸다. 흥주는 한 걸음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며 남편의 무신경한 반응에 실망한 은주는 그를 지나쳐 사라진다. 사라진 은주가 홀연히 재등장한 후 술상을 앞에 두고 부부가 나누는 무뚝뚝한 대화는 사랑, 결혼, 중년의 속성에 대한 씁쓸한 반추를 제공한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후경의 비닐 천막 뒤에서 20대 커플의 그림자가 프레임을 가로지른다.

이처럼 프레임 안팎에서 출몰하는 액션은 서술적 기능을 거의 하지 않으며 시간의 전환, 의식의 표지로 쓰인다. 포개지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은주의 탐색은 암자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흥주의 여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흥주가 토사물을 게워낸 바로 그 위치에서 은주는 눈 바닥에 난 구멍들을 밟고 청평사를 오른다. 여기서 풍경은 완벽히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 다른 맥락을 가지고 이전에 했던 경험을 반복하거나 재창조하는 은주의 이동은 도입부에서 굽이치는 도로를 지그재그로 돌아 달렸던 택시의 움직임을 재연한다. 그녀가 두고 온 것을 되찾기 위해나 있는 궤도 안에서의 움직임은 그들이 시작했던 지점으로 향한다.

장우진의 영화에서 계절과 풍경은 서사와 형식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구성 요소이다. <춘천, 춘천>에 이어 <겨울밤에>에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계절감은 관계의 차이를 기술하는 지표이다. 군인 남자와 여자가 얼어붙은 폭포 앞 연못에서 마주하는 대치 구도의 타블로 숏에서 일체의 계절적 요소는 이 청년 커플의 상태를 묘사한다. 진지하고 수줍은 시인인 남자는 얼음 위를 걸으려는 여자를 막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낭만적인 사랑이 생성되어가는 초입에서 여자는 남자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행동하고, 남자는 얇게 언 얼음이 깨어짐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이 못 속으로 꺼져버릴까 근심한다. 터무니없이 고함을 치던 남자와 그런 남자를 살살 골리던 여자가 단단한 얼음 위로 이동하여 재회할 때 저들의 사랑은 안전지대에 도달한다. 사찰의 정자 기둥이 프레임을 반분하는 구도 안에서 남자가 시를 읊고 입맞춤할 때, 뒤이어 돌다리의 설빙 위를 미끄러질 때 두 사람은 다시 얼음 위를 지난다. 이때 얼음의 두께는 막 시작된 그들의 사랑을 지켜줄 만큼 견고하다.

계절감에 대한 감각적 기술(記述)은 위기의 은주에게도 적용된다. 핸드폰을 찾기 위한 노력이 실패한 뒤에 은주는 청년 커플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폭포 앞 연못가에 있다. 젊은 여자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선 은주가 못으로 손을 뻗치자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얼어붙는다. 30년 동안 마모된 관계에 금이 가는 순간, 은주의 곁에는 남편이 없다. 물가에 갇힌 은주가 오프 스크린 공간을 향해 보내는 애처로운 구조 요청은 겨울의 혹독함에 대한 실감을 준다.

가련한 이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슬그머니 프레임 안으로 밀고 들어온 젊은 연인이 손과 손을 연결하여 그들이 함께 누웠던 단단한 얼음위로 은주를 이동시킨다. 젊은 연인은 위기의 중년 여인을 구해내고, 중년 여인은 너의 미래가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으리라고 자신의 도플갱어를 안심시킨다. 얼어붙은 영육을 녹이는 카페 대화 신에서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구도는 저들의 관계를 알려준다. 은주와 여자는 프레임을 대칭으로 갈라서 나란히 놓이고 프레임 우측 가장자리에 남자가 위치하지만 그는 담배를 피우겠다며 밖으로 나간다. 후경의 천막 뒤에서 그림자로 어른거릴 뿐인 남자는 두 여인의 은밀한 대화에 합석하지 않는다.

<겨울밤에>는 전통적인 서사 관습의 항목들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축소하여 주변의 산만함과 소음을 제거하고 깨어지기 쉬운 표면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증류해낸다. 2018년과 1988년, 둘로 나뉜 시간의 경계를 지우며 스토리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장우진의 스타일이다. 그의 미니멀리즘 양식은 형식적인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국면, 계절과 풍경의 특성에 따라 촬영과 조명은 달라진다. 깨끗한 눈이 세상을 덮어버렸을 때 얻을 수 있는 공기를 활용한 장면들은 겨울 공간의 파란색과 빨간색 네온이 자아내는 비현실적인 무드를 연출한다. 메인 플롯을 마무리하는 몇개의 느린 팬과 처음과 끝에 서로를 마주 보는 택시 시퀀스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단일한 숏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요하고 대화 중심적인 접근 방식을 위해 카메라는 고정되고 종종 극단적으로 먼 위치에서 관조한다. 이와 같은 스타일의 효과 중 하나는 관객에게 지시나 조작 없이 그들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황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인과론적 상호액션의 순간보다 단지 서성대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사람들이 제한된 장소들의 좁은 반경안에서의 행동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살피도록 유도한다.

창문은 거울로, 거울은 창문으로

다시 한번 젊은 여자와 은주가 연못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숏으로 돌아가보자. 거의 동일한 구도로 찍힌 두개의 타블로 숏은 관객이 두 인물의 거울 이미지를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다. 시간의 간격을 초월한 거울상의 대면에도 불구하고 거울의 일부는 맞은편을 반사하지 않는다. 두숏의 세팅은 같지만 존재의 위기에 대한 함의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는 연인의 사랑을 시험하면서 설레지만, 나이 든 은주는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사하는 기능을 멈춘 자리에서 거울은 창문이 된다. 이는 앞에서 흥주가 젊은 여자를 볼 때 창문이 거울로 전환된 것과 정확히 역방향의 전환을 형성한다. 장우진은 반사된 표면을 활용한 재현 전략을 통해 시간과 기억,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러한 인색한 테크닉은 평범한 스토리 액션과 이 영화처럼 느슨하게 구성된 플롯에 잘 어울린다. 표상의 평면성은 액션의 표면 아래에서 발생하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나 풍경의 디테일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시간의 이동을 물질화하는 숏들에서 이런 특성이 확인된다. 회전하는 열풍기, 어묵 국물, 담배 연기처럼 사물과 시간을 연결할 때 정보와 세목들은 특이한 곳에서 비롯되어 패턴을 만들지만, 패턴이 반드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부부의 방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회전하는 열풍기는 영역의 이동을 형상화한다. 냉동되었던 시간이 열풍기가 뿜어내는 열기에 녹아내리자 흥주는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방을 나서고 과거의 유령을 불러들인다. 열풍기의 붉은빛이 방을 물들일 때 나란히 누운 흥주와 은주는 그 회전 방향에 따라 빛과 어둠으로 양분된다.

시간의 구체성을 표지하는 기호들이 별안간 출몰하는 한 장면에서 민박집 거실 장식장에 놓인 서울올림픽의 상징물 호돌이는 1988년으로의 점진적인 이동을 나타낸다. 같은 맥락에서 눈길을 올랐다가 다시 그 발자국을 되밟아 내려오는 은주의 공감각적 액션은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려는 제스처를 재현한다. 그녀는 순백의 눈 위에 발자국을 하나만 남기기 위해 길 위의 흔적을 되밟아 내려온다. 깨끗해지고 싶은 욕망을 투사한 은주의 행동 안에 담긴 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는 속절없는 욕망이다.

동결(凍結)된 세계를 유랑하는 인물들의 의식의 텍스처는 <겨울밤에>의 관심사이다. 이것은 춘천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장우진은 표현을 위한 장치들을 사색의 도구로 변환하는 재능을 통해 관계의 환멸에 관한 씁쓸하고 비관적인 초상을 그린다. 아내는 남편과의 사랑이 시들어버렸다는 증거를 너무 많이 보았지만 아름다웠던 지난 시절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에는 약간의 잔인함이 있다. 끝에서 부부는 다시 택시 안이다. 상대방의 불행과 그것을 고칠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애석해하는 표정이지만 누구도 그들사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낭만적인 우울함의 끝없는 고리에 갇힌 두 사람은 겨울의 청평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택시를 내려 황량한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남는다. 택시는 비상등을 깜빡이고, 두고 온 물건들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을 것 같고, 공든 탑은 무너진다. 장우진은 낙담한 부부가 시간을 초월한 장소에서 보낸 밤의 오디세이를 통해 더이상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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