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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남다은 평론가의 '휴가'

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휴가>

*2021년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으로 이동우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선정되었다. 심사과정에서 이 영화와 함께 최종까지 언급된 영화들은 권민표, 서한솔의 <종착역>(2020)과 이란희의 <휴가>(2020)다. <휴가>에 대한 글을 덜컥 쓰기로 했지만, 염려가 앞섰다. 어떻게 쓰더라도 그저 영화의 내용을 반복한 글이 될 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역시 그러하다. 다만 쓰는 동안, 이 영화에 예의를 지키는 글이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휴가>의 구성은 더없이 단출하다. 비좁은 공간, 반복되는 노동, 그리고 한 사람. 여기엔 이 단출함을 보완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도에 대한 욕망도 없는 것 같다. 인물의 표정은 무뚝뚝하고, 그의 대사는 그 얼굴보다 더 무뚝뚝하고 간략하다. 농성장 천막에서 딸들이 사는 집으로, 집에서 단기간 일터로, 그리고 다시 동료들이 기다리는 천막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의 방향은 별다른 사건 없이 이어진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그려지나 실은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그 경로의 필연성을 영화는 서사 내에서 우회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 행로의 무게와 거기 깃든 시간, 수많은 갈등과 반문을 짊어지고 홀로 묵묵히 걸어가는 자를 응시할 뿐이다. 5년째 천막에서 농성 중인 가구공장 해고 노동자이자 두 딸의 아빠, 그의 이름은 재복이다. 그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이란희 감독의 첫 장편인 <휴가>는 알려진 대로 단편 <천막>(2016)을 확장한 영화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직접 등장해서 9년 가까이 이어온 천막농성의 낮과 밤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의아하게도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다.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이 동료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천막을 지키는 세 사람을, 자신의 이름으로 연기한다. 천막에서 시작하는 <휴가>의 도입부는 5년째 접어든 가구공장 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으로 설정을 살짝 바꾸지만,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나 그들이 처한 상황 등은 <천막>과 거의 같다. 이번에는 실제 노동자가 아닌 배우들이 영석, 만용, 재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천막>에서 자신들의 실제 상황을 연기했던 해고 노동자들을 <휴가>에 기용된 배우들이 다시 연기하는 셈이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임재춘, 그가 연기하는 <천막>의 재춘, 재춘을 모델로 삼은 <휴가>의 재복, 재복을(어쩌면 임재춘을) 연기하는 배우 이봉하. <휴가>에서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영화를 위해 가공된 캐릭터 ‘재복’이 아니라, 이들 모두의 잔상이다. 이수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2020)를 관람한 뒤 <휴가>를 다시 볼 때는 농성을 시작한 지 4천 464일 만에 마침내 길고 긴 싸움을 끝내고 한 달 넘은 단식으로 삐쩍 마른 ‘재춘언니’, 이 미래의 얼굴까지 ‘재복’의 형상에 겹쳐지고 만다. 허구의 틀로 완전히 방어하기 버거운 현실의 그림자, 무엇보다 해고 노동자 임재춘이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휴가>를 부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휴가>의 현재에는 재복의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가 이미 도착해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매 장면, 별다른 미학적 설계 없이 단순히 그저 한 인물을 찍고 담을 뿐인 단순한 허구의 틀이 어째서 이토록 견고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틀의 현재성은 무엇으로 지탱되는 것일까. <휴가>가 우리에게 안기는 울림은 이 물음에서 비롯된다.

우선 <천막>으로 돌아가 새삼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이란희는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의 형식으로 찍으면서도 연기 경험이 없는 실제 인물들을 출연시켰다. 적어도 그에게 이 형식은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그들에게 직접 “날선 질문”을 던지기 어려워 택한 어쩔 수 없는 우회로처럼 보인다. 요컨대 이란희는 그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지난 시간 동안 쌓인 내적 갈등을 묻는 대신, 그들이 천막에서 밥을 먹으며 서로를 원망하고 다투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간 그들이 참아왔을 일련의 감정이 허구의 설정에 기대 묻어나오는 순간을 찍는 것이다. 어색하고 서툰 시선 처리나 대사의 호흡이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 장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그들의 얼굴 때문이다. 압도적이지도 기세등등하지도 능숙하지도 노련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하고 종종 어수룩하고 종종 무기력하며 종종 체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얼굴들. 이 천막의 리얼리티가 그들의 얼굴에 있다는 점을 이란희는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는 재춘이 동료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며 굳게 결심한 듯 천막을 떠날 때, 멀어져가는 재춘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는 인근의 얼굴이다. 아마도 현실의 이인근은 천막을 떠나는 동료의 뒷모습을 이미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천막을 떠나는 동료는 물론, 이인근 자신조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남겨진 자의 얼굴. 누구도 대면한 적 없는 그 얼굴의 심연이 <천막>이라는 허구의 얇은 막 앞에서 짧지만 강렬하게 드러나고야 만다. 이란희 감독은 그때 클로즈업된 인근의 얼굴에서 무서움을 느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천막>에서 그렇게 천막을 떠났던 재춘은 다음날 아무 일도 없던 듯 원래의 자리로 슬쩍 돌아와 있다. 그는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아니, 금세 왜 다시 돌아온 것일까. <천막>은 이 궁금증을 묻어두고 ‘천막’에 머물지만, <휴가>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밥 짓고 천막 지키고 연대하러 가고 또 연대하러 가는’ 3000일 넘게 반복된 천막의 일상을 잠시 단절한다면, ‘투쟁하는 해고 노동자’가 아닌 다른 얼굴을 재춘에게서도 볼 수 있을까. 해고 노동자이자 두 딸의 아빠인 그에게도 연대, 투쟁, 천막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재성을 찾아줄 수 있을까. <휴가>는 이 바람을 안고 천막 바깥의 생략된 시간을 상상해보기 위해 배우의 육체에 기대 허구와의 접촉면을 확장해 보는 영화다. 허구의 힘을 빌려 이 영화가 지켜낸 얼마간의 낙관과 허구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비관이 ‘휴가’의 시간을 채운다.

<휴가>

천막 바깥에서 재복을 기다리는 건 천막보다 비좁은 집, 음식물이 둥둥 떠다니는 막힌 개수대, 그리고 냉담한 딸들이다. 명색이 휴가지만, 그는 쉴새 없이 밀린 집안일을 하고 큰딸의 대학 예치금을 벌기 위해 친구의 목공소로 일을 나간다. 그곳에서 재복은 목공 일로 돈을 버는 청년 준영을 만난다. 준영과 관련된 두 대목에 <휴가>의 낙관과 소망이 담긴 것 같다. 점심시간이 되자, 재복이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사 먹는 준영의 모습을 목공소 건물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혼자 먹는 장면이 있다. 다음날 그는 전날에는 없던 소시지 반찬을 준비해서 준영에게 나눠 먹자고 말하고 준영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날 준영이 목재를 꺼내다 다리를 다치게 되고 재복은 준영이 두고 간 핸드폰을 건네주러 그의 집을 방문한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재복은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준영의 열악한 환경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는 서슴지 않고 텅 빈 냉장고도 열어본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으며 재복은 준영에게 회사에 산재처리를 요구하라고 말하는데, 그때 준영이 고아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둘이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둘 사이에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타인이던 두 사람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장황한 경로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좁히는 이 영화의 장면구성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물론 그것은 재복이라는 한 인간의 힘이기도 할 것이다. 천막에서 그는 언제나 부당해고에 맞선 당사자였고, 익명의 다수에게 연대를 호소하며 더 많은 응시의 대상이 되길 자처하는 자였을 테지만, 지금 천막 밖에서 그는 응시의 주체다. 준영이 아직은 갖지 못한, 노동자의 현실을 바라보고 느끼는 눈을 영화는 휴가 중인 재복에게 부여한다. (목공소를 운영하는 재복의 친구는 아마도 영원히 갖지 못할) 그 눈을 가졌으므로 연민하고 도와야 한다. 재복의 즉각적인 행동처럼 영화는 이 과정에서 어떤 망설임도 내비치지 않는다. 우리는 천막 안의 모진 시간을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든든하고 따뜻한, 실은 희귀한 어른의 얼굴을 천막 바깥에서 마주한다. 다소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나는 누군가를 돕는 사심 없는 얼굴의 감동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 인물들의 무표정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여겨왔는데, 그들의 영혼과 꼭 닮은 얼굴을 <휴가>의 재복에게서도 본다.

또 다른 부분은 재복이 준영의 집을 다시 찾은 대목과 관련이 있다. 재복은 친구에게 준영의 사고에 대해 법대로 산재처리를 해주라고 말하지만, 친구는 어이없어하며 대꾸한다. “재복아, 네가 더 잘 알잖아. 법대로 되더냐?” 해고 노동자인 재복의 처지를 비꼬는 그 말에 재복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다. 다음 장면에서 재복은 준영의 집을 다시 찾는다. 보일러를 고쳐주고 쌀과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어준 다음, 산재 신청서가 담긴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준영 앞에 놓는다. 그는 점심도 못 먹고 신청서를 받아왔다고 말하지만, 준영은 돌변한 눈빛으로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재복은 당황한 듯 준영의 집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목공소 친구로부터 준영이 회사에 요청해 치료비를 받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대목에는 생략된 장면이 있다. 재복이 점심을 거르고 산재 신청서를 챙기러 가는 장면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장면의 시점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에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존재했을 그 순간이 친구의 핀잔을 듣고 고개를 떨구고, 산재신청을 거부한 준영을 보고 황급히 집을 나서던 재복의 초라한 장면을 꽉 붙잡아 존엄하게 바로 세운다. 아니, 두 장면의 초라함은 그저 우리의 편협한 인상이었을 뿐이고, 그는 초라한 적이 없다. 저 생략된 장면이, 영화가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복에게는 당연한 행동의 장면이, 반복의 굴레에 갇힌 서사에 유일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이야말로 이 휴가의 당당한 성취다.

그러나...... 집 밖의 낙관이 집 안에는 남아 있지 않다. 재복이 아무리 딸들을 위해 돈을 벌고 밥을 차리고 집 안을 쓸고 닦아도 그 행동은 결국 그의 부재를 예견할 뿐이다. 그 사실을 재복도 딸들도 영화도 우리도 알고 있다. 몇몇 장면이 이를 슬프게 환기한다. 재복이 귀가한 날 저녁, 큰딸이 수시에 합격해서 청주에 가야 하니, 이제 천막에는 가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한다. 그 말을 하는 딸은 화면 오른편에서 라면을 먹고 있고 재복은 왼편에서 냉장고를 열고 내부를 닦고 있다. 둘 사이에는 냉장고 문이 마치 차단막처럼 놓이고 재복은 그 막 뒤에 숨어서 딴소리만 하며 쩔쩔맨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을 따로 담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냉장고 문이 만들어낸 이상한 화면분할로 딸과 재복의 시선을 인위적으로 차단한다. 아마도 딸의 간절한 바람에 화답하지 못하는 상황의 가혹함을 어떻게든 완화해보려는 영화의 희극적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자신도 그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 장면에는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 맺혀있다.

영화의 후반, 마침내 재복은 열심히 번 돈으로 큰딸의 대학교 예치금과 작은딸의 점퍼를 마련하고 셋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영화 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중한 자리에서 재복은 “내일 서울 간다”며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말을 꺼내고야 만다. 천막에 삼촌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재복에게 우리 모두 같은 반문이 들 것이다. 이 집에도 딸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후, 영화는 혼자 남은 재복의 얼굴에 잠시 눈길을 두지만, 그 얼굴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가여운 딸들을 두고 기어이 천막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 카메라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준영과의 에피소드에서 재복의 얼굴에서는 비록 표정의 변화가 별반 없어도 그 내면을 느낄 수 있었지만, 딸들과의 장면에서 그의 얼굴에 담긴 심경은 내내 헤아리기 어렵다.

<휴가>

영화는 딸들의 원망을 가득 안은 채, 밥상 앞에 앉은 그의 얼굴에서 금세 시선을 거두고 이른 새벽, 도마 위에서 부지런히 칼질하는 재복의 손으로 서둘러 이동한다. 영화는 그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여 닿는 곳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는 딸들이 먹을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천막의 동료들에게 가져갈 반찬을 가방에 담은 다음, 신발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딸들의 운동화를 가지런히 정리하고서야 현관을 나선다. 영화는 재복이 딸들을 떠나 천막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차마 묻지 못하므로, 설령 묻더라도 재복 역시 답하지 못할 것이므로,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대더라도 한쪽을 택하는 일이 다른 쪽을 저버리는 일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으므로, 그의 손길을 찍는 것만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슬픔에 빠진 얼굴이 아니라, 끝까지 그저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손. 흔들리지 않는 그 손은 우직하지만 참으로 냉정하다. 그 손이 고공농성 중인 동료에게 돌아와 도시락을 올려주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다 본 뒤에야 나는 <휴가>에서 모든 일에 꼼꼼하게 최선을 다하는 재복의 손길이 매번, 어떤 마무리의 움직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공소에서의 마지막 저녁, 그가 주위를 찬찬히 살피며 장비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일에 공을 들일 때, 공구 가방을 들고 굳이 준영의 집에 다시 찾아가 보일러를 고쳐주고 텅 빈 냉장고를 채울 때, 귀가한 순간부터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쉴새 없이 집안일을 돌볼 때, 그것은 그저 습관적인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궤적을 정성을 다해 매듭짓고 떠나려는 한 인간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재복에게 그것은 자기 흔적을 지우는 움직임이 아니라, 천막 바깥에 그 흔적을 가장 온전한 상태로 새겨두려는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터전을, 누군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자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그런 삶에 지키려는 최선의 예의 같은 것.

그 예의를 생각하다 보니 “끝내야 하므로” 천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어디선가 들은 임재춘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동료를 두고 천막을 떠나는 해고 노동자의 뒷모습과 어린 딸들을 두고 집을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나란히 상상해본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슬픈 이미지라고 말해야 할까. 대답할 수 없으므로 이란희는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휴가>는 어느 해고 노동자의 얼굴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결국 어떤 얼굴로도 대체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그의 뒷모습을 끌어안은 영화가 된 것 같다. 부지런한 손길로 자신의 자리를 정갈히 마무리하고 온기를 불어넣은 뒤, 다시 떠나는 한 노동자의 뒷모습으로 나는 이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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