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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남는 섬세한 뒤척임
2001-04-25

영화음악 <남과 여>

<남과 여> O.S.T

오늘날 다시 보면 이 영화의 장면들은 흡사 뮤직 비디오의 그것들처럼 감각적이다. 흔들리는 화면, 갑작스런 커트, 비정상적인 클로즈업, 흑백과 컬러의 교차(이건 예산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빙빙 돌기 등 꼭 요즘 CF 화면들의 감각적인 기법들이 거기 다 들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 영화의 대중적인 성공은 누벨바그에서 비롯한 ‘관행으로부터의 일탈’이 이때쯤에 오면 벌써 코드화돼 가고 있다는 걸 방증하기도 한다. 영화가 ‘뮤직비디오’ 같아 보이는 데는 또다른 이유도 있다. 약간 뮤지컬적인 방식을 원용한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음악 사용법 자체가 이 영화를 그렇게 만든다. 갑작스럽게 노래 하나가 흐르기 시작하면 노래가 화면을 쫓아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화면이 노래를 쫓아가는 것처럼 전환된다. 대개 장면들을 위해 봉사하고 음악들은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나 이 영화에서는 한번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그 음악의 힘이 장면들을 끌고 가도록 놔둔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은 후일에도 그러한 방식을 어느 정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음악을 잘 끊지 않는 감독이다. 오히려 음악에 기대어 거기서 뭔가를 끌어낼 때까지 음악을 놓지 않는다.

이 영화의 테마음악을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테마 중 하나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영화음악가 프랜시스 레이의 감상적인 감각은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그러한 방식에 아주 잘 어울리는 듯이 보인다. 그는 귀에 확실히 들어오는 테마 몇개를 설정한 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사이키델릭하게 그 테마를 변주시킴으로써 영화 전체를 중심 테마들의 다양한 변주로 색칠하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 느리고 암시적인, 울림 소리가 많이 들어간 오르간 소리만으로 넌지시 제시된 <사랑의 테마>는 한참 뒤에, 그러니까 카 레이서인 남자 주인공이 몬테카를로에서 6000km를 자동차로 달려 파리에 도착한 뒤 여자주인공의 빈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후에는 이 테마의 계속적인 변주와 반복으로 채워져 있다. 또 팀파니가 둥둥 울리는, 긴박감 넘치는 테마는 자동차의 테마이다. 레이스할 때에는 어김없이 이 테마가 나옴으로써 일관성 있는 긴장감을 유도하고 있다. 그 테마는 남자주인공의 전 부인이 자살하는 이야기까지 이어짐으로써 죽음의 테마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영화의 전개 자체가 즉흥적인 면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그렇다는 점이다. 마치 재즈 피아니스트처럼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프랜시스 레이의 피아노와 하프시코드가(약간 무성의하게 보이는 걸 무릅쓰고) 테마의 변주들을 그리 지루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거기에 하나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에 등장한 보사노바풍의 음악이다. 여자 주인공이 전 남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쓰이는 보사노바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유명한 베이든 파웰의 곡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에서 남는 건 테마음악인 것 같다. “라-라-라-라라라라라” 하는 스캣이 들어간,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하면서도 섬세한 뒤척임이 있는 메인 테마는 사랑의 테마이다. 이 테마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의 여주인공 아누크 에매의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랑의 원형질 안에 푹 빠져 있을 때의 묘한 안정감/들뜸을 이보다 잘 표현한 테마가 또 있을까. 프랜시스 레이는 참 애정영화에 강한 것 같다. 나중에 이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만든 <러브 스토리>의 테마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