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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

관객에게 말을 걸다

편안하고 친근하고 쓸쓸한 감정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영화에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무언가라도 뱉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토록 <소설가의 영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편안하게 보아도 되는 걸까. 분명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장을 나온 길수(김민희)가 홀로 복도를 서성일 때,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모습을 감출 때에, 마치 영화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는데도, 어째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친근함과 편안함이 충만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질문이기보다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떠올린 즉각적인 감상에 가까웠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세계를 줄곧 좇아온 관객에게 넌지시 대화를 걸어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전작들과 새로운 영화를 비교하며 그 세계의 변화를 느껴보려는 관객,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걸 인식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의 변화를 체감하거나 감지하게 될 사람들, 허구는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지, 세상과 영화 혹은 나와 영화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게 될 관객에게 영화는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넉넉한 사유의 장을 펼쳐놓는다.

하지만 나는 여러 질문을 파생시키는 이 영화를 보고도 치열한 탐색전을 펼칠 욕구가 일지 않았다. 되도록 질문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평소라면 이상한 인상과 감정을 남기는 영화의 틈새들과 시간 감각을 교란하는 대화들, 눈에 띄는 형식에 몰두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는 창밖의 과도한 빛, 혹은 영화 마지막 신의 텅 빈 스크린을 연상케 하는 하얗게 빛나는 벽 앞에서 홀로 서성이는 길수의 당혹스러운 상황에 관해 탐색해보려 했을 것이다. 준희(이혜영)와 길수가 있는 분식점 창밖으로 불쑥 나타나는 아이의 존재와 준희가 언제부터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인물들의 대화에 관해서도 의문을 품었을 테다. 그런데도 나는 좀처럼 의문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데 더 관심이 갔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진짜 발생할 것 같은 감정들

가령 나란히 줄 세워져 대화하는 인물들의 반응들, 한자리에 모이는 인원수가 점점 늘었다 줄어드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 가운데 인물들이 나누는 왠지 익숙해서 마음 깊이 파고드는 대화들과 그 사이로 스며들고 빠져나가는 기억들, 삶에 대한 가치관과 예술관과 감정들, 영화 속 ‘소설가의 영화’와 결국 모두가 사라져버린 극장에 남겨진 감정을 곱씹어보는 쪽이 나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준희의 말을 빌리면 영화 안에 “발생되는 어떤 것”들에 반응하는 관객 저마다의 방식이, 홍상수의 어느 영화보다 <소설가의 영화>를 보면서 다양하게 드러날 거라고도 믿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부에는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듯하지만, 사뭇 다른 길로 감흥을 이끄는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소설가 준희가 후배 세원(서영화)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을 방문했을 때다. 준희는 세원의 일을 돕고 있는 현우(박미소)와 이야기 나누면서 그녀가 수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날은 아직 밝지만 날은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라는 내용을 수어로 표현해달라고 부탁한다. 마치 준희의 하루, 또는 삶의 일부를 표현하는 듯한 이 말은 뜻으로서나 이를 표현하는 현우와 준희의 손짓과 표정의 활기로서나 눈길을 끈다. 특히 이때 준희의 얼굴은 성스럽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인데, 어쩌면 홍상수는 이혜영이란 배우에게서 이런 면모를 보았기에 <당신얼굴 앞에서>(2020)와 이 영화에서 그녀의 이 얼굴을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주목되는 인물은 세원이다. 분위기에 휩쓸린 세원은 그들의 수어를 따라 한다. 머뭇거리면서도 멈추지 않는 손짓과 여전히 수줍어하는 표정은, 준희가 세원이 “있다고 해서” 이 서점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광경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두 인물, 두 배우의 섬세한 제스처와 표정이 조화를 이루며 일으키는 인력이 이 장면을 지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홍상수가 준희의 입을 통해 전하는, 감독 스스로 “깊이 느낄 수 있는 배우”들 사이에 “진짜 발생할 것 같은 감정들”이 이 장면을 가능하게 만든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장면 그리고 무수한 움직임

이러한 배우들의 인력은 이후 많은 장면들에서 발생하고 인물들이 나란히 줄 세워져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에서 돋보인다. 특히 영화감독 효진(권해효)과 그의 부인 양주(조윤희), 준희가 공원에서 배우 길수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롱테이크 장면이 압권이다. 카메라는 길수, 효진, 양주, 준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풀숏으로 비추고 있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대화 속에서 화자를 향해 몸을 돌려가며 경청하는 네 인물의 동작은 규칙적이고 귀엽게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곧 흐트러진다. 효진이 활동을 그만둔 배우 길수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가 준희와 격렬한 설전을 벌이면서부터다. 격렬하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흥분한 준희는 언성을 높이고 효진은 계속해서 무안당하며 이에 마음이 상한 양주는 그 장소를 벗어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정작 화두의 당사자 길수는 의외로 침착하다.

고정숏으로 찍혔지만 이 장면 안에선 온갖 운동들이 일어난다.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의 변화, 감정의 움직임, 재빠르게 인물들을 살피려는 우리 시선의 운동들, 누군가의 의견에 깊이 공감하거나 거부하는 우리 감정의 움직임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무수한 운동들은 완패한 감독 부부가 공원을 떠난 후, 길수 남편의 조카인 경우(하성국)의 등장으로 새로운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준희가 길수, 경우와 함께 영화를 찍자는 제안을 하면서 화면 안엔 호의적이고 친밀하면서도 열정적이지만 어딘가 어색하기도 한 분위기가 뒤섞이고, 여러 감정과 뉘앙스가 담긴 인물들의 대화와 제스처와 표정은 세원의 서점에서 이뤄지는 술자리로도 이어진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던 준희는 그 말처럼 이날 여기저기 다니고 술도 마신다.

여기까지 보자면 이런 좋은 날의 흥취에 젖어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소설가의 영화’는 왠지 완성되지 못할 것 같지만, 놀랍게도 영화는 완성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소설가의 영화가 정말 그가 지향하는 바대로 찍혔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찍혔다는 나의 믿음이 빚어낸 인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의 영화’는 사실 홈 비디오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술자리에서 길수와 준희가 나눴던 이야기도 떠오른다. 길수에겐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준희는 술자리에서 급조해냈던 이야기, 길수가 남편과 다툰 후 아무렇지 않게 화해하고 어머니와 남편 다 같이 산책했다던 이야기 말이다. 준희의 단편영화는 이 산책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혹은 이 홈 비디오 같은 영상이 있었기에 <소설가의 영화> 속에 단편영화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여하가 어찌되었든 이 영화 속 영화를 <소설가의 영화> 안에서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할 것 같다. 이 단편영화엔 길수이자 김민희의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 찍혀 있고 그녀는 야생화로 부케를 만들어 손에 쥐고선 환하게 웃고 있다. 한 중년 부인이 곁에서 그녀를 거들고 흑백 화면은 갑자기 컬러로 바뀌면서 완성된 부케가 지닌 가을색이 온전히 드러난다. 김민희의 자연스럽고 환한 미소 때문인지 ‘소설가의 영화’의 천연한 아름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정체 모를 단편영화는 <소설가의 영화>와 공존하며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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