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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상담 방송의 인기 이끄는 오은영 박사를 만나다
임수연 사진 최성열 2022-05-12

오은영, 마음이라는 마법

명의를 향한 선망은 시대를 초월한다. 입시 커트라인까지 상향시켰던 <허준>의 인기가, 아덴만의 영웅이 된 외과의사 이국종 교수를 둘러싼 현상이, 웬만하면 흥행에 실패하지 않는 의학 드라마의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지금 현대인들은 오은영 박사를 정신적 화타로 여긴다. 30여년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연구 논문을 쓰고, 환자들을 진료하고, 방송과 일간지 칼럼을 통해 정신건강 문제를 분석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해온 오은영 박사는 시대적 흐름과 순행하며 활동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뇌과학과 정신의학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마음의 병은 과학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된 유기체로서 개인을 조명하는 사회 분위기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게끔 이끌었다. 오은영을 통해 훈육법을 배우던 부모를 넘어서서 이제는 아이를 키우지 않는 이들도 오은영의 진단을 기다린다. 오은영의원 소아청소년클리닉, 오은영 아카데미, 오은영 지능개발연구소를 이끌면서 자신이 참여하는 고정 프로그램을 제대로 책임지기 위해 늦은 밤까지 뜨겁게 토론하고, 유튜브 채널 <오은영의 버킷리스트>를 론칭해 보컬·발레·피겨스케이팅을 배우고, 그 와중에 일간지에 무려 세개의 고정 칼럼을 연재하며 틈틈이 단행본도 내는 오은영 박사에게 만남을 청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스튜디오의 온도를 앞장서 달궈놓던 그는 다양한 포즈로 시도한 사진 촬영도, 2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도 열정적으로 임하며 독보적인 기운을 증명했다. 평소 오은영 박사의 팬으로서 그의 방송을 부지런히 챙겨보고 있다는 칼럼니스트 복길은 오은영 박사의 방송을 분석한 애정 깃든 칼럼을 보내왔다.

-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PD로부터 토요일 밤 9시부터 프로그램 녹화 회의를 시작할 만큼 바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사진을 찍을 때 보니 현장의 누구보다 열심히 수다를 떨고 매 순간 에너지가 넘치세요.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 우리는 정말 진심으로 방송을 준비해요. 방송이지만 방송만을 위한 방송이 되면 안되기 때문에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고 있어요. 주어진 시간을 가치 있게 써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늦은 밤까지 회의를 하죠. 체력 관리 비법을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저는 운동을 아예 안 해요. 어떻게 하면 운동을 하지 않을까 매일 고민하죠. 그리고 평생 그럴 것 같아요. 식사도 잘 못 챙겨요. 배를 비워놔야 일이 잘되는 사람이거든요. 방송 촬영이 아침 9시30분부터 시작되면 헤어·메이크업하는 시간까지 감안해서 새벽 4시에 집에서 나와야 하고, 일정은 밤 늦게 끝나요. 그때까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체력 관리와 거리가 먼 사람인데 흔히 말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넘쳐서 다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 평생 해왔는데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그냥 행복해요.

- 예전에는 ‘오은영 박사는 육아 전문가’라는 이미지가 강했어요.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박사님이 대중과 만나는 접점이 전 연령층으로 확대된 것 같습니다.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처럼 육아를 다루지만,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는 연예인들의 심리를, <써클하우스>는 MZ 세대를 상담했죠.

= 저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정신건강의학을 전공했어요. 거기에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과정을 하나 더 한 거죠. 소아과는 처음부터 소아과로, 내과는 내과로 시작하는데 소아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과 전문의를 먼저 따야 해요. 전문의 과정을 두번 거쳐야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죠. 그래서 저는 후배나 제자들에게 “우리는 수정란부터 100살까지 다룬다”고 얘기합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고민부터 치매에 이르기까지, 병원에서 일할 때도 그렇게 모든 연령대를 상대했어요. 하지만 방송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방송국의 판단과 시청자들의 니즈가 모두 있어야 하죠. 예전엔 지금보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훨씬 심했어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마음이 약하다는 취급을 받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펄펄 뛰었죠. 그런데 부모는 달라요. 제가 오랫동안 강연해보니까요, 어떤 사람들보다 부모가 제일 잘 배워요. 그리고 배운 것을 가장 열심히 실천해요. 육아를 다루는 게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길이더라고요. 그래서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게 됐어요. 그렇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11년, <생방송 60분 부모>를 12년 동안 했어요. 방송이라는 게 흐름이 있는 것 같아요. 코로나19 때문에 최근에는 사람들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싶어 해요. 그런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성인들의 정신건강을 다루는 방송 콘텐츠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죠.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30년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해요.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한 30년 뒤에 세상이 많이 바뀔 수 있어요.

삶을 바꾸는 말의 힘

-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는 경기도 오산시에서 정신건강 보건사업을 하셨죠.

= 아주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였어요. 정신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국가의 지속적인 관심하에 지역 주민들이 정신건강을 잘 케어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젝트였어요. 변화를 위해서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에요. 저보다 훌륭한 실력을 가진 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십년 동안 묵묵하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일을 해오고 계세요. 인간 대뇌의 반응은 행동이나 생각, 마음으로 표현돼요. 여기에 불균형이 생기면 인간은 불행해져요. 마음은 대뇌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 자신의 전문 분야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기술은 국내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을 말로 전달할 때도 글로 전달할 때도 있죠. 박사님은 말과 글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세요.

= 글은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지식,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정제해서 전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책은 언제나 교과서를 집필하는 마음으로 써요. 기본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담아야 하고, 때에 따라 아주 쉽게 쓰기도 굉장히 어렵게 쓰기도 하죠. 워낙에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이동하면서도 쓰고, 머릿속으로 구상한 내용을 휴대폰에 간단히 녹음한 뒤 이를 글로 다시 정리할 때도 있어요. 지금까지 단행본을 16권 냈고 일간지 세 군데에서 7년 이상 칼럼을 썼는데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사전에서 단어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고 맞춤법을 제대로 지켰는지 전부 체크해요. 원고를 넘기기 전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말은 진심을 전달하는 거예요.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말을 하고 이를 통해 아이를 가르치기도, 내 생각이나 마음을 전달하기도 해요. 말의 힘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을 조금만 바꾸면 삶과 관계가 바뀔 수 있어요. 육아를 할 때 부모가 말을 조금만 바꿔도 아이들이 달라지고 부모-자식 관계도 변할 수 있어요. 반대 의견을 낼 때도 말의 격을 잘 지키면 상대에게 상처를 덜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건 학교에서 안 가르쳐요. 그래서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처럼 ‘마음’이라는 과목이 생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웃음) 마음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배워야 감각이 발달할 수 있는 거지, 그저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럽게 배울 수는 없어요. 일주일에 한 시간씩만 배워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건강해질 거예요.

- 어떤 사람들은 잘 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글을 어렵게 쓰기도 해요. 지식과 화려한 글솜씨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독자를 생각하는 배려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나요.

= 그 분야를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잘 알고 평생 고민했다면 쉽게 설명할 수 있어요. 어렵게 전달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부모에게도 중요한 개념을 아이에게 전달할 때 열 단어를 넘기지 말라고 해요. “네가 화난 건 알겠어. 하지만 동생을 미는 건 절대 안되는 거야.”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 네이버 오디오 클립 <오늘 육아 회화>는 정말 부지런한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였던 것 같습니다. 2020년 5월4일부터 2021년 5월3일까지 총 365개의 에피소드를 매일 업로드하셨어요.

=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운동처럼 한 거였어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말 힘들게 했어요. 외국어를 처음 접할 땐 네이티브 스피커가 말하는 걸 따라 하잖아요. 그처럼 육아 회화를 매일 따라 해보자고 한 거예요. 가령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게 진심이라면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시켜요. <오늘 육아 회화>를 1년 동안 이어가기 위해 8주치 방송분을 한번에 녹음했어요. 녹음실 실장님이 워낙 귀가 예민하신 분이라 제가 목이 갈라지는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하시더라고요. 새벽부터 녹음을 시작하면 저녁 즈음 마무리가 돼요. 다행히 제가 목 관리를 따로 하지 않는데도 호흡법과 발성은 타고나서(웃음),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성대 나이가 아직 30대래요. 그렇게 1년 동안 매일 방송을 업로드할 수 있었어요.

- 지난해 <불안한 엄마 무관심한 아빠>의 개정판을 내셨어요. 초판은 2011년 6월에 나왔죠. “책을 작업했던 2009년에서 2010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모성’과 ‘부성’은 분리되어 있었다. (중략) 그런데 지금은 ‘모성과 부성을 나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부쩍 든다”라는 생각에 책 내용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고요.

= 예전에는 엄마가 집에서 살림과 양육을 전담하고 밖에서 일하는 아빠는 이를 돕는다는 식으로 표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이는 부모가 함께 키운다고 인식이 바뀌었죠. 요즘 육아는 함께하는 거지 누가 누굴 도와줄 일이 아니에요. 모성애와 부성애를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모성애가 더 강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늘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오라고 반박합니다. 기본 철학이나 원칙은 바뀌지 않지만 사람이 살아가고 아이를 양육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시대를 많이 반영해요. 그래서 책 내용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야 해요. 어떨 때는 솔직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10년 전에 내가 얘기했던 내용은 지금 시점에서 적절하지 않거나 효과적이지 않다고요. 제 나름대로 꼰대가 되지 않고 유연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웃음)

- 제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 부모들은 정말 부지런합니다. 일명 ‘맘카페’를 통해 정보도 빠르게 공유하고 영어 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새로운 훈육법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아요. 양육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걸까요.

= 제가 제일 동의하지 않는 말이 “내버려두면 애들은 알아서 잘 큰다”는 거예요. 아이는 노력해서 열심히 키워야 해요. 발달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장 과정에서 보이는 문제를 잘못 인식하게 되고, 대처도 올바르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모가 양육을 열심히 공부하게 된 건 굉장히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양육은 아주 긴 과정입니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너무 지나치게 애를 쓰면 오래 할 수 없어요. 제가 평소에 강조하는 ‘오늘 하루의 최선’은 각자 편안하게 핸들링할 수 있는 선에서의 최선이에요. 그걸 넘어서면 오래 할 수가 없어요. 매일 동화책을 읽어줬어도 어떤 날은 회사 일 때문에 엄마가 너무 지치면 오늘은 쉬고 내일 읽어준다고 해야 해요.

- 그런데 아이가 막 울면 어떡하죠? 오늘 이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난 이 집을 떠날 거라고 선포한다면.

= 오늘 쉬면 내일 훨씬 잘 읽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그냥 아이가 울도록 놔둬야 해요. 그 역시도 아이가 감당해야 하지 아이가 울지 않게 하려고 부모가 감당해버리면 안됩니다. 아이가 감당하도록 놔두면 아이들의 감정도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지나치게 모든 걸 충족시켜주지 말라고 말합니다. 가령 포켓몬 스티커를 갖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빵 50개를 사오려는 마음은 훌륭하지만, 5개 정도만 함께 편의점에 가서 구입하면 족하다고 조언해요.

- 기본적으로 사람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 우리는 100%의 완벽을 추구하며 살지 않아요. 흐름이라는 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은 교육을 통해 인간다워지고, 그 방향은 기본적으로 좋은 쪽을 향하고 있어요. 변하지 않는 일부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체를 보면 많은 사람들은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둔다고 변하지는 않아요. 무언가를 해야 해요. Do it! 그리고 꼭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행위를 해서 그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변화가 아니에요. 내가 다른 사람을 뜯어 고치겠다는 건 오만일 수 있어요. 대신 사람과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이 변하면, 그렇게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쌓이고 쌓여서 많은 것이 변할 수 있어요. 그렇게 사회는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 방송을 보면 선생님은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요. 다른 이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자세는 어떻게 가능한가요.

= 저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 사람이 힘들어하는 이유, 이 사람의 문제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찾아가는 거죠. 저는 제가 광부라고 생각해요. 저 안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혹은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파고 또 파는 광부처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찾아가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당사자도 모르고 있는 지점을 잘 찾아들어가서 그 사람의 어려움이 발현된 이유를 찾아가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좀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본인이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제 앞에서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마저도 그 안에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 면을 찾아가는 거예요.

우주의 유일한 존재, 당신을 위해

- 선생님의 영화광적인 성향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과 마릴린 먼로의 굿즈를 따로 모을 만큼 엄청난 팬이시라면서요.

= 오드리 헵번은 영화 속에서도 너무 아름답지만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유엔 친선 대사로서 아프리카 기아들을 위해 봉사했던, 내면도 아름다운 배우예요. 마릴린 먼로는 보는 사람이 영화에 푹 빠져들게 하는, 측정할 수 없는 매력을 가졌고요.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자이언트>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너무 아름답고, 프렌치 시네마에서는 사진기자님이 오늘 촬영 시안으로 보내주신 카트린 드뇌브모니카 벨루치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남자배우 중에서는 장국영해리슨 포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떠오르네요. 감독별로 영화를 몰아 볼 때도 많아요. 왕가위 감독을 굉장히 좋아하고, 국내에서는 박찬욱 감독님의 초기작을 그렇게 다 몰아 봤어요. 아버지가 92살이신데 지금도 하루 종일 영화 채널을 틀어놓고 옛날 영화를 그렇게 보세요. 제가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고등학생 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혼자 극장에서 보곤 했답니다. (웃음) 의과대학 시절에는 시험 끝나고 2박3일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명보극장, 단성사, 허리우드극장, 피카디리극장을 오가면서 하루 종일 영화만 봤어요.

- 그 시절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뭔가요.

= 어릴 때 가족들과 극장에서 본 <벤지>. 강아지가 가족을 구하는 이야기예요. 벤지가 가족을 구하고 배에 올라타려고 애쓰는 장면에서 엉엉 울면서 “벤지야, 힘내!”라고 외쳤던 기억이 나요. 이렇게 나이를 먹어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영화를 볼 때 정말 행복했던 거죠. <사운드 오브 뮤직>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봤는데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혼자 극장을 찾아가서 한번 더 보고, 추운 겨울날 친구의 손을 호호 불어주면서 극장에 가서 또 봤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지금도 소장판을 갖고 있어요.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하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그 시절이 그대로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 평소 영화를 볼 때도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버릇처럼 분석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신 것 같아요. (웃음)

= 아니에요. 제가 밖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상대를 치밀하게 분석할 거라고도 생각하시는데 전혀 안 그래요. 가운을 입어야 이른바 치료발이 나오지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웃음)

- 다양한 상담을 오픈된 형태로 진행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야 할 때도 종종 있을 것 같아요. 방송에서 스스로를 노출할 때 어떤 가이드가 있으신가요.

= 있죠. 저도 사람인 걸요. 그런데 사람을 초대했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지 내 견해를 얘기하는 건 방송에 모신 분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가령 정치인이 상담하기 위해 출연했어도 그분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그분의 정치적 스탠스를 논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도 <100분 토론>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당하게 저의 신념과 가치관을 말할 수 있을 때는 출연해서 제 색깔을 보여줘요. 제가 평생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설상 상대에게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당당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정치에 대해서는 배움이 깊지 않아요. 시민으로서 가진 입장은 있지만 방송에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 못해요.

- 아이를 열심히 키우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맘충’이라는 혐오 발언을 하는 무리가 있어요. 이건 해롭고 사라져야 하는 언사죠. 다른 한편에서는, 비혼주의자 여성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결혼과 육아를 선택한 기혼 여성에게 가부장제에 일조했다며 서운한 마음을 보이거나 심지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어요. 저처럼 결혼을 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후자, 즉 여성을 위하고자 하는 일이 같은 여성에게 날을 세우게 하는 풍경을 볼 때 마음이 훨씬 복잡해집니다.

= 저는 페미니즘에 대한 배움이 짧아요. 제가 잘 모르는 얘기는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선뜻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도 성불평등을 인지하며 살았던 여성이죠. 지금보다 훨씬 남성 우월적인 시대에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172명 중 28명이 여자라니, 여자가 참 많네”라는 말을 들었어요. 레지던트 지원을 할 땐 “우리 과는 여자 안 뽑는다”고 하는 과도 많았어요. 당시엔 그런 말이 불합리하다고 반기도 들었어요. 제가 의사가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전문직인 의사로 일하면 성차별의 영향을 덜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저는 엄마들이 좀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좀더 생각을 유연하게 갖고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각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삶이 힘들어요. 결혼을 안 한 사람은 결혼한 사람의 삶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몰라요. 그래도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있어야 해요. 의도는 좋지만 너무 형식적인 것에 매달리는 경우가 우리 삶 속에 굉장히 많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예를 들자면, 자식을 예의 바른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부모가 생각하는 예의범절이 형식적인 도덕성에 매몰되면 안돼요. 가령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사 방식을 가르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은 감정 표현을 했는데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내면 아이가 당황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즐거웠다는 거예요. 자식이 결혼하고 나면 갑자기 며느리에게 효부가 될 것을 강조할 때도 있죠. 물론 새로운 가족이 됐으니 잘 지내보자는 의도는 좋겠지만 매주 토요일 아침 전화하게 시킨다거나 하는 형식에 매몰되면 본질은 사라져버려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양분화되고 서로를 혐오하고 반목하게 돼요. 원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 이번 달부터 20여개 시를 도는 전국 투어 토크 콘서트 <오은영, 1도의 변화 우리들의 마법의 순간>을 시작하신다고요. 어떻게 출발한 기획인가요.

= 코로나19는 모두가 위기였다고 표현해요. 어떤 분은 가족을 떠나보냈고, 어떤 분은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자영업자들은 전면에서 버티느라 힘들었고, 버티지 못한 분들도 있어요. 아이들은 한창 나가서 뛰어놀아야 할 때 나가지 못했고, 친구와 어울리면서 사회성을 배울 기회를 놓쳤고, 학교에서 감당해야 할 아이들의 교육을 부모들이 집에서 떠안아야 했죠. 아이들과 집에서 좀더 친해질 기회인가 했더니 몇주가 지나자 내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깨달았어요. 같이 있다 보니 오히려 어려워지고 갈등이 생겼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외부의 자극이 줄어들고 스스로에게 초점이 맞춰지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돼요. 그 과정에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자존감이 떨어지고 위축되는 일도 겪게 됐죠. 이럴 때 눈과 눈을 마주치고 건강한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 <내가 알던 내가 아냐>에서 자신이 죽었을 때 모습을 가상으로 만난 뒤, 인생의 마지막 남은 일주일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셨죠. 여생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부쩍 고민이 많아지셨을 것 같아요.

= 저는 좋은 부모를 만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고, 초등학생 때부터 의사가 되기까지 만난 선생님들에게도 도움을 받았어요. 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환자와 가족들도 모두 저를 가르쳐주신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2008년 대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 전이가 됐다면 3개월 정도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수술을 받고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은 죽음도 열심히 공부하고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게 남아 있는 삶을 잘 살기 위한 길이라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죠. 그래서 죽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제가 받았던 걸 갚아나가고 싶어졌어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려고 해요. 이번 토크 콘서트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이해해보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도 이해해보는 마음을 서로 나누고자 하는 자리예요. 각각의 개인은 우주의 유일한 존재예요. 당신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인지 서로 얼굴을 보며 되새겨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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