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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AN #5호 [인터뷰] 박세영 감독 “곰팡이의 질긴 생명력에 애잔함을 느꼈다”
이유채 사진 최성열 2022-07-11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감독

<다섯 번째 흉추>는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매트릭스에 핀 곰팡이의 서울 유랑기다. 원룸과 모텔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가난한 젊은 연인들과 죽어가는 환자, 지친 노동자들의 척추뼈를 빼앗는 곰팡이는 최종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갖길 원한다. 실험적인 비주얼과 속도감 있는 편집, 퓨처리즘의 사운드로 완성된 곰팡이의 탄생과 죽음, 부활까지의 과정이 처연함마저 풍긴다. 첫 장편 <다섯 번째 흉추>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은 박세영 감독은 인터뷰에서 많은 대답을 미숙과 부족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나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은 바로 이어진 노력과 보완에 관한 말이었다.

-일상적인 소재에 호러의 상상력을 더했다. 아이디어를 어디서 처음 얻었나.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이하 한예종) 때문에 서울에 온 뒤 계속 자취를 했다. 그때 살았던 원룸 중 하나가 환풍이 잘 안 돼서 비가 올 때마다 엄청나게 습했다. 그러니 벽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거다. 처음에는 보일 때마다 제거했는데, 하도 생기니 나중에는 그냥 내 눈에만 안 보이면 된다는 식으로 포스터를 붙여서 가려놨다. 나중에 이사 가려고 한 1년 만에 포스터를 뗐는데, 곰팡이가 3차원적으로 털 같은 게 튀어나온 채로 퍼져 있는 거다. 처음에는 징그럽고 더러웠다. 그런데 또 어떤 면에서는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게 애잔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런 연민과 당시 재정적으로 힘든 환경이 합쳐져 이런 이야기가 탄생했다. 10장짜리 시나리오라 러닝타임 10분짜리 단편을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장편이 되어 신기할 따름이다.

-곰팡이 크리처의 기본 형태와 움직임의 속도는 어떻게 지금과 같아졌나.

=원래 해보고 싶었던 건 1980년대 존 카펜터 영화 속 크리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제작비가 많지 않다 보니 최대한 질감이라도 살려보려고 왁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텍스처를 섞어 지금의 형태를 완성했다. 나중에는 인간이 되는 곰팡이에 맞춰 인간의 피부와 비슷한 질감이 나는 재료들을 찾으려고 했다. 속도의 경우에는 인간이 된 곰팡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무용을 전공해서 전적으로 믿고 맡겼다.

-곰팡이에게 부여한 성격이 따로 있었나.

=질투나 분노를 느낀다고 생각했다. 곰팡이가 “죽어”라는 말을 하면서 탄생하지 않나. 그게 일종의 저주인데, 빈곤한 환경 속에서 한을 가지고 태어난 생명체란 설정이었다.

-곰팡이가 탄생하는 장면이 새끼가 부화하는 과정처럼 찍혔다. 이 장면이 어떻게 보이길 바랐나.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그 장면에서 놀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긴 시간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관조했을 때 화면에서 어떻게 시간성이 느껴지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타임랩스를 사용했고. 생명체의 운동성을 최대한 살리고도 싶었다.

-곰팡이에게 척추뼈를 내어준 인간들이 호소하는 증상이 뜯긴 부분이 아프다는 것뿐이다. 다른 증상은 없는 설정이었나.

=그렇다. 중요한 건 이별의 한에서부터 태어난 생명체가 물리적인 공간에 침투해 척추뼈를 뺏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끝낸다거나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곰팡이에 당한 인간들이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에는 영화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에 대한 서브플롯은 구상하지 않았나.

=찍긴 찍었다. 그런데 곰팡이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끼어드니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샌다는 느낌이 들었다. 곰팡이가 척추뼈를 딱 빼앗고 끝나는 게 더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컷마다 색감, 채도, 콘트라스트 등 공들여 매만졌다는 인상이다. 색 보정을 하는 후반 작업에도 시간이 꽤 들었을 것 같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총 8회차를 찍었는데 회차마다 배우와 스태프와 논의를 거쳐 미리 결정해놨기 때문에 후반 작업은 꽤 수월했다. 그래도 총제작 기간은 6개월 정도 걸렸다.

-한예종 졸업 작품인 <캐쉬백>(2019) 이후 시간을 집약적으로 압축하는 편집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선호하는 건 아니다. <캐쉬백>은 건축이나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같이 뭔가를 만들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건데, 다 찍고 나니 분량이 한 시간 반 정도 나온 거다. 그래서 그걸 졸업 작품으로 제출했는데, 교수님이 이걸로는 졸업이 안 된다고, 더 쫀쫀하게 바꾸라고 하셨다. 그때 수습하는 과정에서 익힌 편집 방식을 계속 쓸 뿐이다.

-미래적이고 SF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운드가 이 영화의 정서를 책임진다. 사운드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랐나.

=연출력이 미숙하다는 걸 잘 알다 보니 내가 원하는 바가 이미지적으로 잘 구현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사운드를 보완책으로 써야겠다 싶었다. 관객이 곰팡이에 감정 이입하며 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슬픈 감성이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당신의 작품에서는 이동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인물들이 단순히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도시에 정착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옮겨 다닌다.

=유년기를 해외에서 보내고 중학교 때 한국말을 전혀 못 하는 상태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렇게 애매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살다 보니 내가 쓴 한국어 대사가 너무 별로더라. 그래서 차라리 인물들의 말을 줄이고 달리거나 걷게 하자고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운동성이 느껴지는 영화로 보이게 된 것 같다.

-작년엔 <Monochrome Valley>란 사진집도 냈다. 특별히 작업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습관처럼 이미지를 포착하는 편인가.

=자본이 충분치 않으니 촬영도 내가 거의 직접 하게 된다. 촬영할 때마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사진은 다를까 싶어서 해봤는데 사진은 더 못 찍더라. (웃음) 어디서 읽었는데, 피카소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 비둘기 발만 반복해서 그렸다고 한다. 나도 많이 찍다 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심정으로 한동안 출사를 다녔다.

-영화과 예술사와 조형예술과 비디오 아트 전문사를 졸업했다. 이후 극영화뿐만 아니라 패션 필름,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영상예술이란 큰 틀만 지켜진다면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편인가.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한 목적이 크다. 그래도 타인의 작업을 돕는다는 보람이 있고, 현장 자체와 그 안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이 있다. 최종적으로 찍고 싶은 건 극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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