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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소울메이트', 여성 서사와 모성 신화

인물의 얼굴을 내도록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이리 비어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소울메이트>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긴 어렵다. 원작인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6)의 잔상이 아른거리고, 서사적 결함이 눈에 밟힌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빽빽하고도 헐겁다. 두 친구의 진한 우정과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빼곡히 채운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온전히 드러나는데, 그 뒷맛이 씁쓸하다. 종국에 드러나는 서사의 평이함 때문인지 이야기가 주가 된다기보다는 반전이 안기는 충격이 핵심인 것 같고, 반격을 가하는 스토리텔링에 강한 집착마저 보인다는 인상이 남는다. 물론 서사의 기본 구조는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며, 서사 전달에 긴장감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매도될 일은 아니다. 다소 투박하지만 야심만만한 구조 안에서 감성 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도 감상자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반응을 간단히 관객 개개인의 몫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민용근의 <소울메이트>를 안이한 방식으로 외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소울메이트’인 하은(전소니)과 미소(김다미)는 우리를 그들의 세계로 온전히 이끄는가. 많은 관객이 두 친구의 면밀한 인생사와 우정에 전율했으니 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사랑보다 두 인물이 사랑의 합일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 영화의 강박적인 태도가 더 크게 다가온다.

한쌍이 된다는 일

<소울메이트>의 진정한 욕망은 하은과 미소의 결합에 있다. 첫 만남부터 강하게 이끌리는 두 인물은 기나긴 시간 동안 이어져 있지만 영화는 처음 이 사실을 숨긴다. 하은이 그린 세밀화 전시회를 기획 중인 갤러리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도입부부터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끌어갈 생각이 없다. 전시회 기획자가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말하는데도 미소는 하은을 거의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 하지만 하은을 스쳐 간 인연처럼 대하는 미소의 품새에 어색한 기색이 역력해 오히려 둘 사이에 대단한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관객으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이유로 사이가 소원해진 걸까. 영화는 하나의 사실과 하나의 가정을 알려준다. 하나는 하은과 미소가 친구였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둘의 관계가 어떤 이유로 변했을 거란 가정이다. 하나의 사실과 가정은 서사의 동력이 되고, 관객에게는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추동한다. 그러고선 영화는 본격적으로 플래시백 장면을 보여준다.

하은과 미소는 1998년 여름 미소가 제주도로 이사 오면서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다. 두 소녀는 외향도 성격도 완전히 다르지만 어딘가 닮았다. 둘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하은은 온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유로움이 부족한 아이며, 미소는 자유분방하지만 따뜻한 가정이 없는 아이다. 둘은 그저 잘 어울려 지내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우정과는 다른 성질의 마음을 품는다. 넓은 범주에서야 우정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크고 깊은 것, 서로에게 없는 것을 채운다. 하은은 가정의 온기를 나누고 미소는 자유로움의 환희를 나눈다. 무엇보다 둘은 한쌍이 되어야 안온해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인물의 결합은 깨지기 쉽다. 우리는 둘 사이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 일어나리라 짐작한다. 오프닝에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시기는 언제일까.

둘 사이의 균열은 진우(변우석)가 등장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한 균열은 첫 번째 징후일 뿐 하은과 미소는 언젠가는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둘의 삶은 너무나 다르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소소한 일상을 함께할 수 있어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때가 오면 차이를 절감하게 될 것이었다. 미소는 하은과 식당에서 다툰 날 하은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를 것이라며 원망하듯 말한다. 미소도 하은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것이다. 어떻게 지내는지 어렴풋이 알 수는 있어도 생활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쓰러질 듯 버티는 미소와 안온한 생활 속에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과는 멀어져가는 하은은 서로의 빈곳을 다 채워줄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소울메이트’란 생활감의 간극을 이겨내기에는 허약한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소울메이트>는 끈질기다. 하은과 미소의 관계가 허약한 상태로 끝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간극을 쉽게 좁힐 수 없으니 둘의 생활을 바꿔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하은은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자신이 하고 싶었던 길을 찾아나서고, 미소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 안정된 길로 향한다. 하은과 미소의 생활은 사회 초년기적의 상대의 삶에 닿는다. 게다가 하은은 미소가 살았던 옛집에 세를 들어 살며 미소가 그랬던 것처럼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에 매진한다. 그런 생활 속엔 미소를 향한 동경과 애틋함과 자아실현의 환희가 어우러져 있다. 그녀의 세밀화에는 카메라가 하은과 미소를 그리 비추듯 사람들의 맨 얼굴이 그려져 있으며 거기엔 꾸밈없이 드러난 미소의 얼굴도 있다. 그러나 미소를 그린 그림은 하은에 의해 완성되지 못한다.

소울메이트는 있되 캐릭터는 편편한

하은에 의해 완성되지 못한 미소의 그림. <소울메이트>는 이 그림이 미소의 손에 의해 제 모습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빈약한 언어가 아니라 애도와 연대의 힘으로 일궈낸 결과다. 달리 말하면 하은의 죽음으로 더이상 두 친구가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없을 때 완전히 완성되는 영혼의 결합인 것이다. 영화는 물론 이를 물리적으로 다루며 하은이 앉았던 자리에서 미소가 그림을 그리며 둘을 끊어지지 않는 인연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이런 의문도 남는다. 이야기의 결을 망치는 의문이라고 해도 데생에 소질이 없는 미소가 하은의 그림을 그리 잘 완성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추상화에 소질이 있었던 미소의 기질은 이제 어디로 간 것일까.

미소는 하은이 낳은 아이에게 ‘하은’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미소에게 하은은 이제 솔메이트이자 딸이다. <소울메이트>는 여성 서사와 모성 신화가 섞여 있다. 그래서 진우는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서사에 눌려 캐릭터가 편편해져버리고 여성 서사는 모성 신화와 묘하게 동거한다. 그런데 이런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하은과 미소라는 인물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인상이다. 솔메이트인 두 친구는 있는데 하은과 미소라는 인물은 잘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상한 일이다. 두 인물의 클로즈업된 맨얼굴을 그리 많이 보았는데 말이다. 하은은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라고 말한다. ‘마음’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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