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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4월 제주 바다처럼 찬란한

영화를 보고 나와 영만이 어머니 이미경 배우에게 메시지를 올렸다. 카카오톡 PC 버전 앞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는다. 뭐라고 쓸까. 꽤 길고 정중하게 썼다가 지운다. 조금 짧고 경쾌하게 썼다가 다시 지운다. 보내진 메시지는 그 중간 어디쯤이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어머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거꾸로 위로받고 있지 뭐예요. 4월16일이 또 지나고 세상은 다시 조용해질지 모르지만,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제 주변에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도 영만이를 살아내고 계신 어머님, 매일 응원합니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전화드려도 편하게 받아주실 텐데, 뭐라 말해야 할지 쉽지가 않다. 유가족과 직접 연락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함께 애도하고 싶지만 마음뿐이어서 자책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참사를 목도한 수많은 이들이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이 사건의 영문을 모르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과 맞닿아 있다. 지인 가족의 장례식장에 가더라도 고인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듣고 나서야 우리는 그 앎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애도에 다가설 수 있다. 9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모른다. 왜 안 구했나.

말의 감옥에서 뛰쳐나와

마땅히 알려야 할 것을 알리지 않는 사회는 개인에게 손쉽게 마음의 짐을 떠넘긴다. 언론이 사력을 다해 밝혀야 할 것을 밝혀야 하는 이유다. 참사가 반복되고 그때마다 유족들이 투사가 돼야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아이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더 멋진 엄마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받은 위로와 사랑을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겠습니다.” 이미경 배우가 답을 보내왔다. 영만이가 살아 있다면 올해 26살이다. 랩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샤워할 때마다 랩을 주워섬겼다. 지금도 영만이의 방은 9년 전 그날 그대로다. 큼지막한 영만이의 얼굴 사진이 책장에 놓여 있다. 오똑한 코에 선한 눈매는 영락없이 엄마에게서 온 것이다. 애초 이미경 배우도 마음 치료 수단으로 커피 내리기를 배우던 어머니들 중 한 사람이었다. 커피 수업이 끝날 즈음 모임을 이어갈 아이디어 중 연극 얘기가 나왔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출발이었다. 그런데 잠깐. 커피를 배우는 일과 무대에 오르는 일 사이에는, “그래도 힘내세요”와 “자식 앞세우고 뭐가 좋다고 웃고 다녀?”의 사이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힘내세요”가 악의는 없지만 무심하게 내뱉어지는 말이라면, “뭐가 좋다고”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말의 감옥이었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는 법이다. 연극배우로 나선 어머니들은 이를 악물기로 했다. 내 아이를 대신 살아내는 일이 어디 그리 쉽겠나. 극단 ‘노란리본’은 2016년 창단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시작으로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장기자랑> <기억여행>을 잇따라 무대에 올렸다. 지금도 전국을 돌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들에게 가장 힘든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이 <장기자랑>이다. <이웃에…>는 유족 자신들의 이야기였지만 <장기자랑>은 떠나보낸 자식들의 이야기였다. <이웃에…>에선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주변의 혐오 발언을 스스로 입에 담아야 했다면 <장기자랑>에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들을 연기해야 했다. 등장인물 캐릭터는 어머니들의 구술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무슨 일에 샘을 내는지 등장인물의 대사에 촘촘히 녹아 있다. 그렇게 무대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준비한 다음 끝내, 제주도에 도착한다. “엄마, 아빠, 3일만 참아. 잘 다녀올게요.” “와, 제주도다! 와, 바다다!” 단원고 교복을 입은 배우들의 대사에 관객은 무너진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문 다음 무대 뒤로 돌아가 무너진다. 공연을 거듭하면 조금은 덤덤해지지 않을까. 7년간 수백번 공연을 했지만 매번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해내는 이유는 ‘저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기억해주세요’, ‘한번만이라도 떠올려주세요’를 온몸으로 말하려는 뜻이다. 어디 가서 우리 아이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지만 연극에서는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가끔은 국내 언론사뿐 아니라 <NHK> 같은 곳에서도 취재를 나온다. 인터뷰를 하려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악착같이 응한다. 내 아이가 한번이라도 더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 악물고 찬란하게

순범이 어머니 최지영 배우는 늘 머리카락을 노랗게 염색하고 다닌다. 노랑은 잊지 말자는 마음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기억하자는 마음을 세상에 보이려는 것이다. 순범이의 꿈은 모델이었다. 그걸 참사 후에 알았다. 수학여행 갈 때 고데기를 챙겨갈 만큼 멋쟁이 남자애인 건 알았지만. 유품을 정리하다 순범이 일기장에 ‘런웨이 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모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써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아들의 장래 희망을 알았다. 최지영 배우는 연극 무대에서 모델이 꿈인 학생 방미라 역을 맡아 연기한다. 객석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이끌어내는 캐릭터다. 그렇게 관객에게 웃음을 안기고 무대 뒤에서 울음을 터뜨리길 반복한다. <장기자랑> 첫 공연을 마친 날, 수면제 한달 보름치를 한번에 털어넣었다. 그냥 자고 싶었다. 뭔가에 이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무대에 오르는 건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나 예뻤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명랑하게 발랄하게, 그리고 찬란하게 아이들의 본모습 그대로. 무대에서 인물을 빛나게 하는 것이 내 아이를 빛나게 하는 길이니까.

그런 최지영 배우가 노란 머리카락을 모조리 잘라내야 했던 일이 있다. 박근혜 사면. 연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피해자들은 또다시 투사가 됐다.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정치공학 앞에서 많은 이들이 무력감을 느꼈다. 더더욱 알아야겠다. 왜 안 구했나. 이 사회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무너지는 것만 같을 때도, 어머니들의 곁을 지키며 극단을 이끌어온 이가 있다. 연극 연출가 김태현 감독은 “세월호 어머니들이 연극을 하고 싶어 한대”라는 말에 지체 없이 안산으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지금껏 7년을 동고동락했다. 이렇게 오래갈 줄은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연극배우가 될 수 있을까. 2016년 안산의 한 복지관에서 어머니들이 생전 처음 연극이란 걸 해본 날, 김 감독은 “이만하면 대학로 진출입니다!”라며 추켜세웠다. 어머니들이 뭐라도 하면 요란하게 박수치며 칭찬을 쏟았다. 그로부터 넉달 뒤 ‘노란리본’은 실제로 대학로 극장 무대에 섰다. 이후 이미경 배우는 국립극단, 전태일 재단 등의 작품에 캐스팅되기도 했다. 올해는 ‘이영만 연극상’을 제정해 첫 시상식을 열었고, 매년 2월19일 영만이의 생일에 생명의 가치를 담은 작품과 연극인을 선정해 시상할 예정이다. 영만아, 이 정도면 엄마 잘 살고 있는 거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노란리본’ 단원 중에는 자식을 잃지 않은 어머니도 있다. 장애진양은 그날 엄마 품에 돌아왔다. 그의 장래 희망은 유치원 교사였다. 그날 이후 꿈을 바꿨다. 응급구조사가 된 그는 지금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인사다. 애진 어머니 김순덕 배우는 희생자 어머니들을 돕기 위해 극단에서 허드렛일이라도 도우려다 배우가 됐다. 생존자 역시 피해자이지만 입장이 달랐다. 생존자를 향한 일각의 혐오 표현도 기가 차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진이는 그날 이후 벚꽃이 필 때만 되면 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딸 얘기를 함부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 유족이 다가왔다. 애진이 얘기 좀 해달라고. 애진이가 커가는 얘기가 듣고 싶다고. 그에게 애진이는 떠나간 자식 사이에 놓인 다리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노란리본’의 다른 단원들에게 김순덕 배우와 김태현 감독은 일종의 교량 같은 존재가 돼주고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사이에서 생명의 끈을 붙들어주는 사람이 어딘가엔 있다.

영화 <장기자랑>은 희생자 유족들이 연극 배역을 놓고 갈등을 빚는 등 ‘피해자다움’에 대한 시선에서 벗어나 인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데 무게중심을 싣고 있다. 여러 주요 매체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썼다. 적절한 기사들이다. 다만 여기서 그친다면 <장기자랑>과 등장인물들을 온전히 말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들이 왜 이렇게 연극 무대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지 물어야 한다. 이 사회는 이들이 왜 이런 방식의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개봉 2주가 지난 4월19일 자정 현재 <장기자랑>의 누적 관객수는 5820명이다. 그러는 2주 동안 한국의 어떤 어른들은 다음의 일들을 저질렀다.

무능과 무의지 사이

강남 학원가에선 집중력 향상을 미끼로 학생들에게 마약 성분 음료를 배포한 조직범죄가 일어났고, 학교 폭력을 겪은 뒤 숨진 학생의 유족이 8년을 끌어온 소송에 담당 변호사가 출석하지 않아 패소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안전검사를 통과한 다리 보행로가 무너져 한 여성이 사망했으며, 만취한 60대 운전자가 몰던 차량에 9살 어린이가 숨졌고, 전세사기 피해로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 2명이 자살했으며, 급기야 강남의 중학교에선 한 남학생이 동급생에게 흉기를 휘두른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기후 위기로 세력이 커진 것으로 보이는 산불이 충남과 강원 산지를 집어삼켰다. 지난 2주간의 뉴스에 나온 대형 사건만 추린 게 이렇다. 이 사회는 여전히 영만이, 순범이, 예진이, 윤민이, 동수, 수인이, 애진이에게 부끄러운 사회다.

잘못 돌아가는 사회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게 볼 때 무능이고 나쁘게 보면 악이다. 최대한의 선의로 해석해 9년 전 그날 희생자들을 구하지 않은 것을 무능 탓이라고 본다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지금 이곳은 다름 아닌 무능사회다. 공동체보다 각자도생을, 공존보다 승자독식을 내버려둔 채 문제가 심각하다고 떠들면서도 이를 전환할 능력은 없는 방치사회다. 숱한 의사결정권자들이 입으로는 진보를 말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는 수구사회다. 불평등 사회에서 낭떠러지 아래로 가라앉는 이들을 구조할 힘도, 산업화의 욕망이 부른 생태계 위기에서 다음 세대를 꺼내줄 힘도 부족한 사회다. 그런 가운데 미래 세대는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기성세대가 능력이 없는 것인지 의지가 없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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