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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호퍼의 여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박선 2023-05-19

<자동판매기 식당> (1927)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는 신원 미상의 여성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호퍼의 1927년작 <자동판매기 식당>(Automat) 속 홀로 앉은 여인을 들 수 있다. 유리막 안에 전시된 음식을 동전을 넣어 주문하는 자동판매기 식당은 1920년대 미국 도시 문화의 고유한 풍경이다. 커피잔을 들어올리는 여인은 정작 커피 자체에는 무관심한 듯하다. 상념에 빠진 듯한 인물의 자태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후경의 유리벽에 반사된 실내등의 긴 행렬은 깊은 상념의 시각적 등가물이다. 이 여인이 심중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같은 해 개봉한 할리우드영화 <잇>(It)의 여주인공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클래라 보가 연기하는 베티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지만 거침없는 언행과 타고난 성적 매력으로 뭇 남성들을 매료시킨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워 누구에게든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자임한다. 베티는 범인은 갖지 못한 ‘그것’(It)을 갖춘 셈인데, 그것인즉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익명의 도시 문화 안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능력일 것이다. 클래라 보의 ‘잇걸’(It Girl)은 수동적 성역할에 반기를 든 신여성이자 포효하는 1920년대의 아이콘이다. 미술사학자 에리카 도스는 <자동판매기 식당>의 인물에 대해 “비서일 수도, 사무실 직원일 수도, 백화점의 판매 사원일 수도 있을 이 여성은 20세기 초반 직업과 새로운 경험이라는 자유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여자 중 한 사람이다”라고 추측한다. <잇>의 ‘잇걸’과 다르지 않은 묘사다. 그러나 호퍼의 화면을 메운 정서는 포효가 아닌 적막이다. 클래라 보의 ‘잇걸’이 물고기처럼 편안하게 도시 생활을 유영한다면, 호퍼의 여인은 낯선 표류지를 배회하는 듯하다. 여인의 침묵이 도드라질수록 배경 또한 낯선 시공간으로 거듭난다.

이같은 형상화 방식은 2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표현주의 회화와 호퍼의 그림이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표현주의는 공간과 형상을 심대하게 왜곡하여 불안과 공포를 시각화했다. 인물 또한 배경과 마찬가지로 뒤틀려 공황 심리를 표현한다. 반면 호퍼의 그림은 표상의 사실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물의 눈길은 배경과의 상호작용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만큼 주변 공간은 독자적이고 생경한 장소성을 품는다.

지금까지 영화가 재해석한 호퍼의 공간은…

<철길 옆의 집> (1925)

영화는 주로 낯섦의 공간 미학을 서사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호퍼의 그림을 인용해왔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싸이코>(1960)에서 호퍼의 1925년작 <철길 옆의 집>(House by the Railroad)을 재현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호퍼의 그림은 빅토리아풍 저택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지만 전경의 철로가 저택의 하단을 가리게 함으로써 전통과 현대의 미묘한 긴장을 포착한다. <싸이코>에서 호퍼의 저택은 살인마 노먼 베이츠가 죽은 어머니의 유골과 함께 기거하는 장소로 각색된다. 베이츠의 집 전면에 있는 모텔은 그의 사업체이자 희생양을 낚는 함정이다. 호퍼의 철로가 현대성을 상징한다면 히치콕의 모텔은 일상과 정상성을 표방한다. 반면 이들 뒤편에 놓인 저택은 각각 몰락한 구시대와 분열된 인격을 암시한다. 히치콕은 호퍼의 낯선 공간을 억눌린 본능의 거처로 재해석한다.

히치콕의 추종자 브라이언 드 팔마는 호퍼 회화의 스타일 또한 빈번히 차용했다. 드 팔마의 1981년작 <필사의 추적>의 도입부 장면에서 카메라는 여자기숙사의 내부를 염탐하듯 살핀다. 누군가의 시선을 반영하는 듯한 롱테이크는 반라의 여성 인물들을 좇으며 관음적 시선에 부응한다.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을 연상시키는 기숙사 공간은 위험이 도사린 폐쇄병동에 가깝다. 해당 시퀀스는 호퍼식의 공간 안에서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로 끝을 맺는다. 샤워하는 여성이 난도질당하는 상황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는 뉴욕의 광장, 카페, 극장, 홍등가와 같이 에드워드 호퍼에게 영감을 주었을 도시 공간들을 나열한다. 호퍼의 영향을 자인하는 스코세이지는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 1942)을 인용하여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과 동료 택시 운전사들간의 회합 장면을 연출했다. 실상 영화 전반을 뒤덮은 붉은 색조와 어두운 조명은 호퍼 회화의 분위기를 답습한다.

<싸이코>의 집

그러나 <택시 드라이버>에서 소외의 공간 미학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트래비스와 여주인공 베티가 첫 데이트에서 찾는 포르노 극장이다. 베티는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의 선거운동원이며 그만큼 정치적 이상주의에 고무된 인물이다. 포르노 극장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자체 검열제도였던 프로덕션 코드(1930~68) 시대를 마감하고 등급제를 도입함으로써 파생한 1970년대 미국 영화문화의 새로운 풍경이다. 등급외 극장을 표현의 자유가 확장된 결과로 해석한다면 베티의 진보적 정견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티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포르노 관람을 권하는 트래비스의 무례함이 경악스럽다. 정치 구호를 외치며 뉴욕의 거리를 활보했을 베티에게 음습한 관음의 소굴은 도시 전체를 생경한 정글로 다시 보게 했을 것이다.

호퍼의 공간 미학을 영화에 도입한 사례들을 봤을 때, 낯선 도시의 희생양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더불어 호퍼 회화의 애초 의도가 그랬을지도 자문하게 된다. 이에 대해 호퍼의 에칭 그림 <저녁 바람>(Evening Wind, 1921)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여성 누드화인 이 작품에서 모델은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 순간 외풍이 개방된 창문을 관통하고 커튼이 펄럭인다. 여인이 바람에 놀라는지, 반색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열린 창문과 바람이 폐쇄된 침실에 모종의 자유로움을 몰고 온 느낌은 분명하다. 호퍼의 전기작가인 게일 레빈은 이 작품이 “자유와 자기 인식”에 대한 상상력을 담았다고 분석한다. 바람이 상징하는 변화와 자유는 여인에게 새로운 자의식을 일깨운다. 여인은 순풍에 편승할 것인지 역풍을 거스를 것인지 자신의 길을 결정해야 한다. 이 인물이 호퍼식 여성 표상의 원형이다.

고독 너머의 고뇌, 20세기 여성의 징후적 목소리

<저녁 바람> (1921)

호퍼의 그림은 통상 소외와 고독의 정서를 담아낸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공간이 아닌 인물로 초점을 바꾸면 그 인물은 자신이 내던져진 공간 안에서 암중모색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독과 고뇌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고독이 수동적 반응이라면 고뇌는 능동적 선택이다. 양자는 의식의 스펙트럼 안에서 서로를 견인하며 고유한 개인성의 경지를 만들어간다. <자동판매기 식당> 속 인물은 모든 젊은 여성을 ‘잇걸’로 평준화시키는 도시 문화의 전횡에 맞서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호퍼 그림의 여성 표상을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현실 속 여성으로 그려낸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가 1931년부터 1965년 사이에 발표한 13편의 회화 작품을 활인화(活人畫, tableau vivant) 방식으로 각색했다. 호퍼 원작의 스타일을 유지하되 회화 속 인물들은 실제 배우가 연기하여 나열된 그림들에 극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주인공 셜리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탐독하는 지식인이자 사실주의 극단 그룹 시어터(Group Theater)의 일원으로서 대공황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데 헌신한다. 매카시즘의 광기에 굴복한 엘리아 카잔의 변절에 좌절하던 셜리는 다시 리빙 시어터(Living Theater)에 합류하여 예술을 통한 사회 변혁의 도정을 이어간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의 방>(1932)을 활인화로 각색한 장면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가령 호퍼의 1931년작 <호텔 방>(Hotel Room)을 극화하는데, 짧은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엿보기 심리를 자극하는 듯한 원작 그림의 모델은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서 상투적 공연예술에 불만을 토로하는 연기자 셜리로 변모한다. 호퍼의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1932)에서는 신문을 읽는 남자와 피아노 앞의 여자가 서로 시선을 회피한 채 한방에 앉아 있다. 이 그림을 각색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공연 일정을 위해 긴 합숙을 떠나야 하지만 연극인의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애인과의 결별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고 되뇐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 회화의 여인을 대공황, 매카시즘, 베트남전쟁, 민권운동과 같은 격변기에 직면하여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고민하는 능동적 여성 예술가로 재해석한다. 소외의 이미지를 고뇌의 이미지로 뒤바꾼 셈이다.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가이 로지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얄팍한 자기현시”라고 깎아내린 바 있다. 고립감을 저항 의식으로 치환한 작업이 마치 이어폰을 낀 반 고흐의 <자화상>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정작 호퍼 개인은 동시대의 여성들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호퍼는 자신의 그림에 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예술가는 새로운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것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외로운 탐험가가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목소리다”.

우리는 한국 화가 나혜석(1896~1948)의 자화상에서, 일본 화가 다케히사 유메지(1884~1934)의 여인화에서 호퍼의 여인들과 비슷한 모습을 본다. 호퍼, 나혜석, 다케히사의 여성 초상은 모두 20세기라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다 간 뭇 여성들의 징후적 목소리들을 품고 있다. 이들 목소리의 내용이 고립인지 저항인지 굳이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미래의 관객이 자신의 처지를 투사하여 그 의미를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권을 관통하여 내면에 침잠한 여인들의 초상화만 따로 모은 전시회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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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