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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과 공존하는 영화들
김소미 2023-05-19

“호퍼는 항상 이야기하기 직전에 있다.” 미국 시인 존 업다이크의 말을 변용하자면 호퍼의 그림은 언제나 내러티브의 단초를 품고 있다. 영화 장면과 비슷한 종횡비, 외로움을 발명하는 탁월한 시선이 더해진 그의 그림에 많은 영화감독들이 열광한 것은 새삼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1930~50년대 필름누아르 작가들은 호퍼의 그림 속에서 우울의 그림자를 부풀렸고, 앨프리드 히치콕은 관음적 시선에 집착했으며, 빔 벤더스는 황량함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지독한 외로움을 알아보았다. 토드 헤인스는 호퍼의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상태를 들여다보며 멜랑콜리 또한 더했다. 영화의 장면과 에드워드 호퍼 작품의 공생 관계를 주도한 주요 감독들의 영화를 소개한다.

앨프리드 히치콕

<이창>의 미스 론리하츠와 <밤의 창문>

호퍼의 그림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의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기묘한 이질감과 불안이 느껴지게 한다. 대낮의 스릴러를 만드는 앨프리드 히치콕이 호퍼에게 즉각 빠져든 이유다. 그는 일상에 스며든 낯선 타인들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 <의혹의 그림자>(1943)에서 종종 리얼리티를 깨트리는 크레인숏을 동원해 호퍼 회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조적인 그림자들을 만들어내고, 그 깊은 대조감 속에 인물들을 배치했다. 또 히치콕은 도시의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는 호퍼적 시선에서 현대적 고독을 음미하기보다 관음증의 욕망을 끄집어냈다. <밤의 창문>(1928), <호텔 방>(1931), <뉴욕의 방>(1932)이 보여주는 창 너머 관찰자의 시선은 <이창>(1954)의 토대가 되었다. 망원렌즈로 이웃을 관찰하는 남자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창>이 혼자 사는 여성 미스 론리하츠(주디스 에블린)를 보여주는 방식은 침실에서 탄로나는 묘한 고독감을 그린 <밤의 창문>의 분위기와 특히 유사하다. 밀집된 도시 환경에서 침입하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히치콕은 호퍼의 그림이 보여주는 고립과 소외의 상태를 더욱 극단적으로 몰아붙여 인물들을 외부에 취약하게 노출된 존재로 몰고간다.

한편 히치콕의 <싸이코>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더욱 정신분석학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평가받는다. 한방에 있거나 침대 위에 있는 남녀의 모습에서 성적인 요소가 분명히 느껴지지만, 그와 동시에 단절감도 뚜렷한 호퍼의 그림엔 해소되지 않는 섹슈얼리티가 팽배하다. 호퍼의 쓸쓸한 <철길 옆의 집>(1925)은 <싸이코>에서 성적으로 억눌린 남자의 무의식이 깃든 저택으로 변주된다. 히치콕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호퍼는 이러한 변용을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창>의 미스 론리하츠와 <밤의 창문>

에드워드 호퍼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게서 등장인물은 특수한 개인이라기보다 거대한 정서 혹은 시대적 징후이다. 호퍼 작품 속 여인들을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듯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 속 여성들 역시 모더니스트가 그려낸 고독의 한 표상이다. 또 호퍼가 아내 조세핀을 모델로 삼은 것처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지배하는 피사체 역시 그의 아내이자 배우 모니카 비티였다. 호퍼와 마찬가지로 줄곧 소외의 문제를 건드렸던 안토니오니는 첫 컬러영화인 <붉은 사막>(1964)에서 공업 지대를 그리면서도 강렬한 붉은빛, 그에 어우러지는 우울한 색채감을 강조하면서 호퍼에게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는다.

빔 벤더스

<파리, 텍사스>와 <석회암 채석장>

빔 벤더스는 호퍼의 그림에서 빈 공간에 주목했다. 모텔이나 주유소, 교외의 텅 빈 도로처럼 대단히 미국적인 공간은 외부자의 시선을 통해 그 황량함 사이로 일말의 낭만도 입게 됐다. 채도 높은 색감의 실내, 텅 빈 석회암 사막 지대를 로드무비의 배경으로 삼은 <파리, 텍사스>(1984)가 대표적이다. 빔 벤더스가 사랑한 할리우드영화에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 작품은 자연광과 인공광의 강한 대조 면에서도 호퍼 회화처럼 위태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빔 벤더스는 <폭력의 종말>(1997) 발표 당시 존경하는 예술가로 에드워드 호퍼를 꼽는가 하면, 3D 설치물 <에드워드 호퍼에 대해 내가 아는 두세가지>에도 참여했다. 빔 벤더스는 호퍼 작품의 시네마틱함에 대해 “에드워드 호퍼의 모든 그림은 새로운 장면의 시작이고, 그것이야말로 미국에 관한 한편의 긴 영화다”라는 말로 찬사를 보탰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파리, 텍사스>와 <석회암 채석장>

외로움에의 골몰에 관한 한 호퍼만큼 집요한 예술가일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호퍼를 비롯해 렘브란트, 드가의 작품이 주는 긴장감을 자신의 미학으로 흡수했다. <성냥공장 소녀>(2001), <르 아브르>(2011), <희망의 건너편>(2017) 등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질서에서 살아남으려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동안 생활 공간을 낯설게 변모시킨다. 주인공들은 매우 익숙한 장소에 머물고 있는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격리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성냥공장 소녀>에서 고된 근무를 마치고 혼자 외로운 생일을 보내는 주인공 이리스가 카페에서 가만히 케이크 한 조각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자동판매기 식당>(1927)에서 홀로 커피를 내려다보는 여성이 그랬듯 단순한 구도로부터 실존적 고뇌를 낱낱이 뜯어보게 한다.

토드 헤인스

<캐롤>

호퍼는 필름누아르뿐 아니라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장르영화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줬다. 호퍼의 열렬한 애호가임을 밝혀온 토드 헤인스는 특히 2015년작 <캐롤>에서 이전의 어떤 작품보다도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호퍼를 인용한다. 이는 <캐롤>이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당대의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가한 억압과 편견을 고찰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적절해 보인다. 특히 주로 레스토랑 식탁에서 펼쳐지는 대화 장면은 줄곧 식당의 인물들을 관찰해온 호퍼의 그림들과 직접적으로 공명한다. 캐롤과 테레즈의 첫 만남은 미국식 중화요리 식당에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두 여성의 모습이 담긴 <찹 수이>(1929)와 겹치며, 초록색 옷을 입고 신문을 든 캐롤과 붉은옷을 입은 맞은편의 테레즈가 식당에서 대화하는 장면은 <체어 카>(1965)의 구성과 (배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점이 동일해 토드 헤인스가 고심한 애정 가득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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