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이주현 편집장]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주현 2023-08-04

지구가 펄펄 끓고 있다. 유럽에선 40도가 넘는 폭염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고 있고, 미국 플로리다 남부 바다의 수온은 38도까지 상승했다고 한다. 멀리 눈 돌릴 일도 아니다. 최근 강원도 강릉에선 열대야를 넘어 밤 최저기온이 30도 이상인 초열대야가 발생했다. 정말이지 24시간이 덥다. 어쩌면 지금의 극단적 기후 현상은 지구의 비명일지 모른다. 그 비명을 인간이 모른 척한다면 아포칼립스 영화가 현실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한편 폭염 속에서 4만보를 넘게 걸으며 카트 정리를 했던 대형 마트의 청년 노동자가 사망했다. 야외에서 고강도 노동을 하는 건설 노동자와 플랫폼 배달 노동자들의 폭염 속 휴식권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휴식권. 일을 멈추고 쉴 권리. 건강에 무리를 줄 수 있는 환경일 때 잠시 일을 멈추고 쉬겠다는 게 무리한 요구일까. 상식적으로는 무리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감독’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 플랫폼 배달 노동자들이 왜 휴식권을 보장받기 힘든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세상은 결코 상식적으로 돌아가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다.

연일 디스토피아의 징후들을 맞닥뜨리다보니 요즘은 도통 재난영화가 ‘영화’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올여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4편의 한국 블록버스터영화 중 가장 터무니없어 보이는 설정은 해녀들의 밀수(<밀수>), 우주에서의 고립(<더 문>), 타국에서의 납치(<비공식작전>)가 아니라,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도시 전체가 붕괴되고 덩그러니 아파트 한채만 남은 상황을 기본값으로 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대재앙과 대재난이 요즘 같은 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재난 이후를 헤쳐가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 투쟁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잿빛 세상은 소름 끼치게 현실적인 데가 있다. 엄태화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재난물에서 희망을 보여줄 때 늘 어딘지 가짜 같다는 느낌을 받아왔다”면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보여주는 세계는 “권선징악보다는 인과응보”에 가깝다고 말했다. 권선징악이 유토피아에 어울리는 말이라면 인과응보는 디스토피아에 어울리는 말이다. 지구 열대화도 인과응보, 아포칼립스도 인과응보, 너의 불행도 인과응보, 나의 행복도 인과응보, 인과응보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섬뜩한 인과응보!

<씨네21>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코너의 제목이 ‘디스토피아로부터’인데 어쩌다보니 이번주 에디토리얼이 ‘디스토피아로부터’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콘크리트 유토피아>까지 올여름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 4편이 모두 언론에 공개됐다. 이번주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비롯해 <밀수>의 류승완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대담 등을 실었다. 날도 더운데, 4편의 한국영화가 뜨겁게 경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흥행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