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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아직도 니 얼굴이 이렇게 생생한데
복길(칼럼니스트) 2023-08-31

음악을 들을 때 장소는 얼마나 중요한가? 최고급 음향 시스템이 갖춰진 청음실이나 아티스트와 오감을 나누는 콘서트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매달리고 싶은 질문은 특정 음악이 ‘장소’로 인지되는 소소한 경험들에 있다. 2008년 겨울에 강남역에서 안경을 살 적, 가게 점원 중 한명이 너무도 서럽게 울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가게에선 빅뱅의 <Forever With You>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그 노래만 들으면 강남역의 시리고 차가운 슬픔에 마음이 잠긴다.

종종 음악은 모든 기억을 되살린다. 거꾸로 하면, 음악이 없었던 순간은 아주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 2017년의 어느 겨울밤, 나는 회사 사무실에 있었다. 무슨 요일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업무가 쌓여 야근을 해야 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던가, 굶고 커피를 마셨던가. 그냥 정신없이 닥친 일을 쳐냈던 것 같다. 대충 마무리하고 나니 밤 12시였던가, 새벽 한시였던가. 퇴근하다 말고 다시 돌아와서 외장하드를 챙겼던 것 같기도 하고, 동료 직원의 긴급한 요청을 거절했던 것 같기도 하다. 퇴근을 어떻게 했더라. 차를 타고 갔었나? 버스를 탔었나? 잘 모르겠다. 남산 1호 터널을 지났는지, 3호 터널을 지났는지, 한남대교를 건넜는지, 한강대교를 건넜는지. 집으로 가는 동안 뉴스를 본 것은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잠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날은 무언가 막연히 슬프고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고, 나는 그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보다 10년 앞선 어느 날의 기억은 아주 또렷하다. 샤이니를 처음 본 것은 분당 ‘롯데리아’에서였다. 30분 넘게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천장에 디스플레이된 모니터에선 케이블 음악방송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이어폰이 없는 외출은 시간이 왜 그리 더디게 흐르는지…. 20분이 더 지나고서야 멀리서 뛰어오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묵힌 인내심이 투정처럼 터져나오려던 찰나, 음질이 좋지 않은 롯데리아 스피커에서 모든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신선한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지금은 고전이 된 바로 그 추임새. 슉- 틱- 타-! “미안한데, 미안하다는 말, 잠시 멈춰줄래. 지금 엄청난 음악이 나오는 것 같아….” 친구가 나를 따라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고 이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태민이!”

햄버거를 먹으면서 친구는 30분 동안 ‘너만 모르는 샤이니’에 대해 꾸짖듯 열변을 토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그 연설의 가장 큰 특징은 말하는 내내 ‘태민이가 중학교 3학년인 게 마음에 걸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누난 너무 예뻐>라는 노래를 좋아하면서 그런 양심을 운운하는 게 웃기지 않냐며 놀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자책이 <누난 너무 예뻐>가 진정 바라던 반응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때 우리는 ‘태민이’와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지만, ‘누나’라는 단어에 자극받아 고통을 호소하며 점점 더 샤이니에 빠져들었다.

<누난 너무 예뻐>라는 충격적인 데뷔곡 이후, 샤이니가 지금껏 내놓은 음악은 모두 ‘무엇이 샤이니의 대표곡인가?’를 주제로 논쟁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전성기를 언제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누난 너무 예뻐>와 함께 많이 거론되는 타이틀곡은 <Ring Ding Dong> <줄리엣> <Sherlock·셜록> <View> 등으로 좁혀지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를 두고는 모든 앨범의 트랙이 거론되기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굳이 대표곡을 정해야 돼?”라는 볼멘소리를 할 때까지, 누군가 “아바의 <맘마미아>처럼 샤이니 전곡으로 뮤지컬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기원할 때까지.

2013년 발매된 샤이니 3집 타이틀곡 <Dream Girl>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샤이니의 노래지만, ‘샤이니 대표곡’을 정하는 논쟁의 중심에서는 살짝 비켜 있는 곡이다. 사실 나는 모든 가수의 정규 3집 앨범을 덮어두고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K팝 아이돌들의 3집이라면 더 볼 것도 없이 명반임을 확신한다. 샤이니의 <Dream Girl>, 2PM의 <하.니.뿐.>, 소녀시대의 <The Boys>, 카라의 <STEP> 등. 이들의 정규 3집은 대체로 부푼 자신감 뒤에 약간의 불안이 비치는 일종의 독립선언이자, 데뷔 후 겪은 방황과 독립에 대한 기대감이 혼재하는 사춘기의 증표다. 나는 앨범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3집에서 느껴지는 그런 혼란스러운 흔적들에 무작정 마음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Dream Girl>은 최고의 ‘3집 타이틀곡’이다. 곡의 시작부터 바짝 긴장을 불어넣는 20살 태민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키의 신기한 탁성이 이어 붙는다. ‘꿈속에서 만난 여자에 대한 미스터리’를 전개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보컬이라 생각할 때쯤, ‘K팝의 음색’을 꼽을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온유의 목소리가 곡에 입체적인 결을 만든다. 2절이 시작되고 민호의 샤이한 목소리가 끼어들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K팝 그룹의 래퍼들이 부르는 멜로디 라인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자주 들을 수 없어 귀하고, 어딘가 불안해서 더욱 설레는 목소리! 그리고 곡이 끝날 때쯤엔 알게 된다. 샤이니의 영원한 화자이자 주인공인 종현의 목소리가 모든 구간에서 강렬한 임팩트를 내며 이 노래를 완성하고 있다는 것을. 각각의 보컬이 선명하게 몰아치며 귀를 파고들 때, 나는 비로소 샤이니의 목소리를 완전히 구분할 수 있었고, 그들이 매우 이른 때에 이룩한 격조 또한 체감할 수 있었다.

샤이니의 음악을 들을 땐 특정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Dream Gril>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그 곡만 언제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늦은 저녁, 자취방 침대 위, ‘샤이니 월드’ 친구가 페이스북으로 공유한 유튜브 링크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공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줄면서 나는 그것으로 인해 자주 우울함에 빠지지만, 그 곡을 침대에서 들었던 경험만큼은 무척 아름다운 일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덕분에 나는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 노래를 떠올릴 수 있고, 장소와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꿈꾸듯 샤이니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20대의 모든 환희와 상실을 온전히 함께한 이 5인조 그룹의 노래가 내 무의식 속에 좌표 없이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면, 슬픔도 외로움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내게 작용한 K팝의 초능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