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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육지에서 떨어진 외로운 섬, <절해고도>
조현나 2023-10-13

“…나는 조각가라기보다는 태양계 전문가가 되어가는 것 같다.” 태양계 모형을 만들던 윤철의 내레이션에는 일말의 자조가 섞여 있다. 한때 촉망받는 조각가였지만 아내와 이혼한 후, 생계를 위해 본업보다 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데에 치중한 까닭이다. 그러던 중 대학 강사인 영지(강경헌)와 가까워진 윤철은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다. 한편, 윤철의 딸 지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미술에 재능을 보이며 미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살인과 혈흔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지나의 작품에 비판이 가해지면서 학교에서도 지나를 문제아로 인식한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지나는 출가를 선언한다.

영화의 제목인 ‘절해고도’는 ‘육지에서 떨어진 외로운 섬’을 의미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엮어 지칭하기에 이처럼 좋은 제목도 없을 것이다. 윤철과 지나, 심지어 영지마저도 개별적인 섬과 다름없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이혼한 아내와 사는 딸을 서먹하게 대하고 영지와의 불화를 매끄럽게 제어하지 못하는 윤철의 태도 외에도 영화에 흐르는 윤철의 내레이션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지나가 스님이 됐다는 소식을 읊을 때마저 윤철은 제3자처럼 건조하게 서술한다. 극의 중반부까지 인물들은 계속 고충을 겪고 갈등하지만, 이를 타인과 함께 해결하기보다 궤도를 벗어난 차선책을 택하길 선호한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겨진 채로 윤철은 객사할 위기에까지 처한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막이 시작되듯 영화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극의 전환은 <절해고도> 연출의 특이점이기도 하다. 영화는 시간순으로 사건을 서술하지 않는다. 가령 차에서 시체처럼 발견됐던 윤철은 돌연 머리를 단정히 다듬고 칼국숫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지나 역시 머리를 깎고 도맹 스님이 되어 등장한다. 변화한 모습을 토대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관객은 추측해볼 뿐이다. 윤철은 종종 도맹 스님이 거처하는 절에 들러 잔업을 돕는다. 지나의 출가 문제를 두고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을 때와 달리 윤철과 도맹 스님은 어느새 불도에 따라 예를 갖추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표하는, 완전히 달라진 관계가 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혈연관계라는 인연을 벗어던진 후에야 두 사람은 진정 서로를 이해하게 된 모양새다. 가족도 결국 타인에 불과하고, 그 틈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둘은 서로의 곁을 조금씩 내어준다.

김미영 감독은 ‘절해고도’라는 제목을 두고 “개별자의 고립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육지와 떨어진 섬들은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을지라도 “바다를 매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재한다. 간극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위에서 관계의 여지를 탐구하는 것. 그 길고 지난한 과정이 영화 속 인물들의 행보에 담겨 있다.

지나는 윤철을 닮았다.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지만, 그런 과거의 소망과 달리 결국 예술가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마저 그렇다. 그러나 혈연관계를 벗어난 시점에서 윤철과 지나의 관계가 다시 시작됐던 것처럼 예술가라는 목표에서 벗어났을 때 윤철과 지나 모두 자유롭게 주변을 살필 힘을 얻는다.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비로소 스스로를 성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특정 목표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도리어 본래의 자신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절해고도>의 인물들의 설정에도, 심지어 모든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 연출법에도 담겨 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갈 뿐인 사람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그들의 걸음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절해고도>의 주요 공간들

김미영 감독은 로케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해 장소 물색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이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강창호 미술감독이다. 강창호 미술감독은 김미영 감독이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에 있을 때 미술팀에 소속된 스탭이었다. 현재는 창원에서 미술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때문에 마산과 창원 지역 예술가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집과 작업실, 극 중 인물들이 다녀간 노래방 등 도심 지역의 로케이션은 대부분 지역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섭외할 수 있었다. 또한 낚시를 자주 다니는 강창호 미술감독 덕에 여러 항구 및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적절한 공간을 찾아냈다. 김미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전 먼저 고려했던 제목은 ‘숲길’이었다. 그만큼 영화에서 인물들은 도맹 스님이 머무는 절 뒤편의 숲길을 자주 오간다. 절은 김미영 감독이 잘 아는 소담한 명상수행센터와 그 뒤의 산길이 배경이 됐다. 극 중 후반부에서처럼 해당 산길은 실제로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계절별로 로케이션을 살핀 김미영 감독은 “절정과 다름없는 여름을 지난 가을이 캐릭터들의 다음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생각해” 최종적으로 가을을 촬영 시기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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