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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소리굴다리’ 구파수 륜호이 감독, 마음의 형태를 조각한 끝에 마주한 공명의 시간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23-10-20

유일무이. <소리굴다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화다. 이걸 영화라고 한정 짓는 건 이 범상치 않은 결과물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표면적으로는 2046년 근미래 배경의 SF 디스토피아물이다. 인류의 종말을 감지한 AI가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예술가들을 찾기 위해 여러 굴다리를 탐색한다는 설정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메시지도 담고 있다. 그런데 굴다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는 방식이 심상치 않다. 파도, 물, 혈액, 그림자 등 각종 이미지가 오버랩되고 CG가 범람하더니 어느새 판소리의 울림이 모든 공간을 덮는다. 밴드 아나킨 프로젝트의 음악과 함께하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였다가, SF였다가, 실험적인 미디어 아트였다가, 음악과 파동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포착한 끝에 마침내 ‘소리굴다리’라는 형태로 공명된다. 영화제가 발굴과 만남의 장이라면 그 온전하고 순수한 결과물이 여기에 있다.

<소리굴다리>를 연출한 구파수 륜호이(본명 윤상정) 감독은 이름부터 눈길을 끈다. 2015년 극과 다큐멘터리가 융합한 <사류>의 공동 연출을 맡아 이미 독특한 색을 선보인 바 있는 윤상정 감독은 무려 8년 만에 새로운 이름으로 돌아왔다. “창작자가 누구인지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 별칭을 생각해봤다. 김수영 시인의 시 <구름의 파수병>에서 따온 이름이다.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하는 구절을 읽으며 일종의 자기 반영성을 마주한 것 같았다. 그게 이번 작업과도 연결된다고 느껴 이런 이름을 정했다.” 그는 앞으로 당분간 구파수 륜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될 것 같다고 했지만 이름이나 명칭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한 그는 <사류> 이후 꽤 오랜 시간 생계를 위한 작업에 매진하던 중 문득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을 얻었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아내와 함께 작은 영상제작사(핸드 시네마)를 차려 문화유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왔다. 지지난해 추석 아내와 아이와 함께 길을 가다 어떤 굴다리에서 리코더 연주를 하는 아이를 마주한 적이 있다.” <소리굴다리>는 깊은 인상으로 남았던 그 순간의 우연 같은 만남들, 그사이를 메우는 상상이 보태져 지금의 형태로 빚어진 결과물이다. 애초에 극, 다큐멘터리, 미디어 아트 등 특정 형식으로 출발하지 않았던 심상이 자연스럽게 혹은 운명처럼 서로 섞이는 와중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갔다고 해도 좋겠다. 구파수 륜호이 감독은 “처음엔 굴다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밴드 아나킨 프로젝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들의 행보를 한번 따라가봐야겠다는 다큐멘터리적인 구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각 작업들이 공명을 일으켰다”고 회상한다.

구파수 륜호이 감독은 어떤 형식과 틀에 기대지 않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심상을 유일무이한 형태로 조각한다. 우발적이고도 운명적인 순간을 마주하며 영화, 영화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새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