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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지루함 혹은 지연에 관한 옹호와 의심, ‘거미집’과 ‘화란’

<화란>과 <거미집>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한국영화이자, 장르영화다. <화란>은 누아르이자 성장영화이고, <거미집>은 코미디이자 영화에 관한 영화다. 애석하게도 둘은 (다른 많은 개봉작이 그랬듯) 기대보다 낮은 관객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었다는 점 외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 영화는 편집에 관한 인식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통한다. <거미집>은 극 중 ‘플랑 세캉스’라는 편집 용어를 이례적으로 자주 언급한다. 김지운 감독은 이를 두고 일종의 맥거핀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나, <거미집>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떤 것도 중심의 자리에 놓을 수 없으므로 부차적 요소로 치부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거미집>은 맥거핀을 모아 생성한 거대한 집과도 같기 때문이다. <화란>에는 시퀀스를 마무리하는 편집점이 너무 빠르거나 느슨한 순간이 있다. 어떤 시퀀스는 인물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작두로 베어내듯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는가 하면,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만 보여주다가 수습하지 않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갈증을 일으킨다. <화란>의 이야기를 익숙한 반복이라 여기면서도 끈적한 잔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다.

영화의 편집에 관한 이런저런 상념은 올해 한국 여름영화를 두고 나눈 대담의 소재였던 매끈함이라는 개념을 되짚게 했다. 송형국 평론가는 한국 상업영화들이 지나치게 매끈해졌음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영화의 매끈함은 무엇보다 편집 방식을 일컫는 말일 테다. 편집에 있어서 상업영화가 축적한 정확성과 효율성은 좋게 말하면 높은 완성도로, 나쁘게 말하면 감성을 건드리지 못하는 웰메이드로 치부된다. 즉 매끈함은 좋고 나쁨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개별 작품에 따라 다른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두 영화에서 편집을 인식하게 된 순간은 매끈하지 않은 굴곡에 가깝다. 그와 같은 변곡점은 작가의 개성의 표출이나, 리얼리티의 기제나, 관객에게 말 걸기 등 여러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어떤 해석도 충분하지 않다.

판단을 유보하는 와중에도 <거미집>이 계기가 되어 <화란>으로 이어진 질문만은 명확했다. 대중이 어디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계산해온 공식이 더는 통하지 않을 때 영화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거미집>과 <화란>이 어떤 대답을 들려주고 있다고 해도 새로운 공식으로 삼기는 힘들다. 두편을 합쳐 겨우 50만 남짓한 관객을 동원 중인 기록이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두 작품을 지향점으로 삼기는 어려워도 지금의 지형도를 그려보기에는 충분하다.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을 잃어버린, 혹은 관객을 잃어버린 영화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느슨한 지연의 순간에 깃든 질문을 꺼내보고 싶어졌다.

플랑 세캉스의 겉과 속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거미집>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루함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서울의 한 영화 세트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촬영이 완료된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기로 한 초유의 사태를 그린다. 주요 배우들과 함께 엑스트라와 스탭, 제작자와 문공부 공무원까지 다양한 인물과 상황을 개입시키며 소동극이 될 만반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소동극이 지녀야 할 가벼움을 끝내 방기한다. <거미집>을 불의 영화라고 말한다면 그 의미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기보다는 타오르기 직전이나 불이 꺼진 뒤 무겁게 내려앉은 연기에 가깝다. 영화의 무거움은 단연 송강호가 연기한 감독 김열 캐릭터에서 기인한다. 그는 확신에 불타는 인물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물로 귀결된다. 다른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희화화되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속마음 내레이션을 멈추고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며 웃음을 지운다.

김열은 일가족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육의 동선이 교차하는 시나리오의 결정적 장면을 플랑 세캉스로 촬영하려 한다. 이 장면은 배우들의 연기에 맞춰 이리저리 위치를 옮기며 실시간으로 연기를 지시하는 감독과 촬영 스탭의 모습과 함께 드러난다. <거미집>을 통해 강조된 플랑 세캉스의 의미는 그것이 카메라의 움직임을 인식하게 만드는 편집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숏 안에 현장의 몸짓이 끓기지 않는 지속을 통해 기입된다는 것이 김열이 플랑 세캉스에 매료된 이유처럼 보인다. 김열이 흔들리는 주연배우 호세(오정세)를 다독이며 했던 대사 그대로 “힘들게 찍으면 화면 안에 들어간다”는 말을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플랑 세캉스를 통해 영화가 잇고자 하는 것은 숏과 숏 사이가 아니라 카메라의 안과 바깥이다. 영화는 극중극과 촬영 현장이 교통하는 순간을 담는다. 흑백으로 촬영된 극중극 장면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울린 전화벨 소리는 알고 보면 촬영 현장에서 울린 소리였고, 촬영 현장에서 감독 김열의 말이 배우의 대사처럼 처리되기도 한다. 김열의 영화가 상영된 이후의 크레딧에는 감독과 배우의 극 중 이름 대신 김지운 감독과 배우들의 실제 이름이 뜬다.

그러나 플랑 세캉스가 현장과 영화의 간극을 넘어설 궁극의 촬영이자 편집 방식임을 강조하는 것이 <거미집>의 목적지는 아니다. 극중극과 영화의 현장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김지운이 선택한 1970년대는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와 컬러 현장 사이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시대다. 극중극과 현장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만으로 둘 사이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오프닝 시퀀스에 삽입된 극중극 장면은 1970년대 영화의 편집 방식을 그대로 흉내낸다.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빠른 편집, 자극적인 장면과 특유의 목소리 톤으로 당대의 파워풀한 묘사를 재현한다. 이 재현 장면은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촬영하고 편집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흉내내기에 불과할 뿐 오늘날의 김지운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전혀 새로운 것을 한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다시 찍는 김열은 새로운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의 영화에 잇대어 있음을 표시한다.

김지운이 <거미집>에서 하지 않은 것은 영화의 호흡을 가다듬고 지루한 틈새를 잘라내어 가쁜 호흡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거미집>의 예고편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예고편과 달리 본영화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호흡은 느슨하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마치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은 스크린에 그대로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둘 사이의 유리감을 영화는 현장과 극중극 사이의 무마할 수 없는 감각을 통해 보여준다. 극중극 장면은 과감한 클로즈업과 빠른 편집을 통해 긴박한 호흡이 강조되어 있다. 반면 현장은 어수선하고 인물들은 허둥대지만 찰나의 틈새를 메우는 대사와 음향 효과는 드물게 쓰인다. 현장 장면은 때때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무대 연극처럼 보인다.

<거미집>은 <더 문>과 결과적으로는 동일할지라도, 정반대의 전략을 사용한다. <더 문>은 함께 박수치고 눈물 흘리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관객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런데도 동조적 반응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거미집>은 이미 자신의 영화가 웃음도 울음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자의 심경이 담겨 있다. 물론 실패에의 예감은 반전이 되지 못했다. 관객의 반응은 밀려드는 박수 소리보다는 무표정한 김열의 얼굴에 더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 결말을 바꾼 영화가 상영을 마친 영화관에서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클로즈업된 감독 김열의 무표정한 얼굴은 결말을 바꾼다 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와 영화의 간극에 대한 김지운의 깨달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말에 앞서, 소결에서 일단락된다. 궁극의 플랑 세캉스는 김열의 것이 아니라 김지운의 것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영화 촬영이 끝난 뒤 배우들이 서둘러 각자의 차를 타고 떠나고 나면 미도(전여빈)의 시선에서 감독 의자에 앉은 김열의 뒷모습으로 줌인한다. 영화 내내 김열의 속마음을 일인칭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주었던 영화는 영화가 마무리될 즈음부터는 그의 속생각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영화에 만족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 들려오는 것은 오직 숨소리다. 그는 이후 혼자만의 기억이 재생되는 스크린의 유일한 관객이 되지만, 기억의 스크린이 보여주는 내용이 그리 유의미한 반전으로 보이진 않는다. 감독이 된다는 것은 지긋지긋한 현장을 건너 침묵과 고독 속에 남겨져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플랑 세캉스라는 이름의 숨소리가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반성의 누아르

<화란>은 돈을 벌기 위해 조직에 가담하게 된 연규(홍사빈)가 뒤늦게 발을 빼려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을 보여준다. 조직의 중간 보스인 치건(송중기)과 연규는 각자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고 있으며 둘의 관계 역시 유사 부자 관계로 볼 여지가 있다. 부자 관계가 서사의 주된 줄기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이 중심이 되진 않는다. 여기에는 하얀(김형서)과의 관계나 가족 문제, 친구 관계 등이 얽혀 있다. <화란>의 오프닝은 <거미집>의 극중극 오프닝처럼 효율적인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략적인 구도로 불필요한 묘사를 피하면서 상황을 명확히 보여준다. 학생들이 모인 운동장에서 한 학생이 묵직한 돌로 다른 학생의 머리를 가격하고, 피 묻은 돌이 고인 흙탕물 위로 떨어지면서 타이틀이 뜬다. 반면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관성적으로 묘사하고 넘어갈 법한 장면을 집착적으로 보여주는 반전을 그린다.

<화란>이 집착적으로 묘사하는 것 중 하나는 폭력의 디테일함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디테일하고 섬세하다. 벌어진 상처를 돌로 짓이기거나, 펜치로 손톱을 뽑거나, 위에서 내리누르는 작두의 칼날을 손바닥으로 잡아 막는다. 이러한 묘사의 공통점은,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의 지속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총을 쏘거나 급소를 찌르는 것과는 달리 관객이 상처나 통증을 체감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이러한 상황이 액션으로서의 폭력 묘사보다 더 잔혹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디테일한 묘사는 폭력의 관성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폭력 자체에 관한 비판적 인식을 불러오기도 한다. 반면 치건 일당이 완구(홍서백)와 그의 아들을 폭행하는 민감한 장면은 여지없이 생략된다.

연규가 치건의 조직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 혹은 치건이 연규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지극히 표면적이다. 술에 취해 귀가한 새아버지의 관습적 폭행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로 연규의 한쪽 눈에 세로로 가로지른 줄무늬의 상처가 생긴다. 이 상처는 연규의 인상을 험악하게 바꿔놓아 그를 중식당 아르바이트생에서 치건의 대출 사무소 졸개로 만든다. ‘어린 놈이 여길 왜 와?”라고 타이르던 치건은 연규의 상처를 본 뒤 그를 받아들인다.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가능하지만 영화는 다른 방식의 리얼리티를 구축하려 한다. 연규가 조직에 편입되는 과정은 돌이켜보면 배우의 캐스팅과 비슷하다. 배우가 캐스팅될 때 적합한 관상이 요구되듯이, 사채업자가 되는 데도 적합한 관상이 있다. 눈가를 가로지른 상처가 필요했던 인물은 연규만이 아니라 그를 연기한 홍사빈 배우이기도 했다. 선한 인상의 그가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상처가 필요했다.

그러나 영화는 연규를 순수한 과거를 잊고 타락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연규는 누아르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선한 인물이며, 상처 입은 뒤에도 여전히 그렇다. 중식당 사장(정만식)이 담뱃재를 털어넣은 자장면을 완구의 아들이 먹을까 봐 노심초사하던 연규는 중식당 앞을 지키던 개를 승무(정재광)가 내려치려 하자 온몸으로 막아선다.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싫어서 대신 명예를 실추시키는 방안을 기획하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는 완구를 끌어안는다. 연규는 마치 누아르의 주인공이 되려는 인물이기보다 누아르를 반성하기 위해 그려진 인물 같다. 연규와 하얀(김형서)은 다른 자리에서 치건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어쩌면 이들은 누아르를 망치기 위해 온 구원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화란>이 누아르를 위한 무대로 채택한 것은 특수한 외부가 아니라 보편의 집이다. 연규의 집은 현관과 주방과 거실이 좁게 맞붙은 숨이 턱 막히는 장소다. 연규와 하얀은 방 하나를 커튼으로 가려 나눠 쓴다. 아버지 정덕(유성주)은 문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나 문 아래쪽 틈으로 비치는 발걸음 등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정덕이 연규를 폭행할 때 연규의 어머니 모경(박보경)과 하얀이 동석해 있지만, 어떠한 상황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오열하는 이는 없다. 모경은 말없이 숨을 죽이고, 하얀은 절제된 행동과 대사와 함께 응시하는 표정으로 강하게 만류한다. 둘 혹은 셋의 식사 장면은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거나, 양상추와 피클 따위를 서로에게 던지는 썰렁함으로 채워진다. 정덕은 연규의 인생에서 최고의 악당인데, 잔혹하게 누군가를 해칠 수 있게 된 그의 성장이 한없이 두려운 존재였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귀결되지 않은 점도 어쩐지 미더운 부분이다.

찬란한 침묵

비판적으로 바라보기에 충분했던 지루함과 지연의 순간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난니 모레티의 <찬란한 내일로>(2023)를 보았기 때문이다. 난니 모레티가 연기한 감독 지오바니는 아내가 제작자로 참여한 다른 감독의 현장에 난입해 촬영을 중단시키려고 애쓴다. 이들이 촬영 중인 장면은 해당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한 남자가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다른 남자의 이마에 총알을 박는 장면이다. 난니 모레티는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러한 장면은 반성 없이 반복된 클리셰일 뿐이라며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한다. 지오바니는 이들을 막기 위해 심지어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통화를 시도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끝없는 설득에 그를 제외한 모두가 지치고, 촬영은 속절없이 중단된다. 결국 지오바니는 현장에서 밀려나고 해당 장면을 해치우듯 촬영한 이들은 미련 없이 환호하며 해산한다. 난니 모레티는 침묵한 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실패한 풍경 위에 저항의 잔상을 새긴다.

<찬란한 내일로>는 실패의 결과와 지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결국 실패하더라도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하며 누군가는 끝내 남는다. 야망이든 꿈이든, 양심이든 저항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남은 자들은 침묵으로 무언가를 말한다. 올해 기억하고 싶은 몇편의 영화들은 그처럼 유의미한 침묵으로 시간을 지속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명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거기에 무언가가 있음을 느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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