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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오래된 미래 송형국 평론가가 바라본 한국영화의 근대적 서사의 위기

극장은 근대적 플랫폼이다. 기차역, 학교, 지상파 방송, 대부분의 제조업 공장이 그렇다. 지난 100~200년 사이에 틀을 갖췄다는 점, 소수의 공급자가 다수에게 같은 재화를 제공한다는 공통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 플랫폼의 공급자들은 하루 24시간을 축으로 시간표를 짠다. 수용자는 특정 장소로 가야 한다. 기차를 비롯한 근대 플랫폼의 콘텐츠들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정확히 도달한다. 공급자들은 스스로 정한 규칙을 생명처럼 여긴다. 규칙에 맞추지 않는 사람은 이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지상파 드라마 <모래시계>(1995)는 ‘귀가시계’로 일컬어졌다. 상징적이다. 그 재미있는 걸 보려면 시간에 맞춰 집에 가야 했다. 그때 고현정최민수의 활약을 볼 수 있는 시공간은 방영시간 TV 앞뿐이었다. 인기 드라마는 시청자의 흥미만 사로잡은 게 아니다.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손에 쥐었다. 근대적 플랫폼은 이처럼 시간성과 장소성에서 절대 지위에 있었다. 귀가(공간)-시계(시간)는 근대 문화의 공급 법칙을 설명한 셈이다. 비슷한 시기 한국영화도 사람들을 극장에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박중훈최진실의 로맨틱 코미디를 볼 수 있는 시공간은 상영시간 스크린 앞뿐이었다. 비디오 대여점을 통해 이걸 보려면 몇달을 기다려야 했다. 단성사나 서울극장 매표소에는 긴 줄이 늘어서곤 했다. 줄의 길이는 설렘의 크기이기도 했다. 압축 성장의 다른 결과로 한강 다리가 무너지고 이듬해 백화점이 붕괴한 그즈음은,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돈돈돈 땅땅땅 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달라진 시간성과 장소성

자본은 발이 빨랐다. 극장을 멀티플렉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가 개관했다. 이후 전국 주요 도시 거점마다 영화관이 생겼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가 개봉한 2003년엔 기록도 여럿 나왔다. 전국 스크린 수가 1천개를 넘어섰고 그해 관객 총합이 처음으로 1억명을 넘었다. 이는 극장이 확장했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극장이 갖던 시간성과 장소성에 균열이 시작됐다. 작품뿐 아니라 시공간의 선택 폭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다. 필요한 걸 요구하면 감정노동자들이 웃으며 응대해줬다. 관람 행위는 그렇게 쇼핑 행위와의 차이를 좁혀갔다. 실제로 대부분의 멀티플렉스가 쇼핑몰 내에 위치했다. 이용자가 오래(시간) 머물도록(공간) 유도하는 방식으로 근대적 극장의 고유성은 지워져갔다. 관객은 고객이 됐다. 그런 와중에 한국의 멀티플렉스는 전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실천했다. 유럽은 말할 것 없고 미국의 어느 멀티플렉스도 1개 작품에 전체 상영 회차의 70~80%를 몰아주는 곳은 없다.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 한국 개봉일, 이 영화의 전국 상영점유율은 80.8%를 찍었다. 한국영화 100주년이던 그해 전국 스크린 수는 3천개를 넘었고 여기서 영화가 하루 약 1만8천 차례 상영됐다. 한국인은 인구 37만명가량의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전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국민이었다. 4년 전 얘기다.

디지털을 만난 신자유주의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손에 붙어 있다. 극장영화의 경쟁 상대를 OTT만으로 보는 시각은 시민 다수의 삶과 거리가 있다. 우리는 당장 터치 몇번만으로 영화, 뉴스, 드라마, 드라마 축약본, 커피숍 경관 자랑, 웹툰, 게임, 예능, 실제 교통사고 영상, 강의, 스포츠, 먹방, 포르노를 손 위에 띄울 수 있다. 이 모든 게 영화의 경쟁자다. 극장의 시간성과 장소성이 지워진 영향이 크다. 고객이 된 관객에겐 가격 대비 만족도만 남았다. 몇해 전까지 8천원 하던 영화 관람료가 1만4천원이 됐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2인 가구가 월 1만3500원에 넷플릭스 영화 10편을 본다고 치자. 1인당 영화 관람료는 675원에 불과하다. 소셜미디어 콘텐츠들의 ‘가격’은 더 말할 게 없다. 코로나19는 변화를 앞당겼을 뿐 이다.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스크롤에 익숙해진 이용자는 영화도 1.5배속으로 보고 건너뛰기로 보고 축약본으로도 본다. 더욱이 수용자들은 몹시 은밀한 방식으로 자신이 좋아할 만한 정보들에 노출된다. 디지털 자본주의의 플랫폼에서 시공간의 선택 폭은 사실상 무한대인 데다 콘텐츠는 편향돼 있다. 독점적 플랫폼을 마련해놓고 그곳에 오래 머물도록 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가만, 이건 멀티플렉스의 사업 방식 아닌가. 자본이 좇는 방향이 원래 그랬다. 그러니까 멀티플렉스는 자신들과 같은 방식을 쓰는 강력한 상대를 만났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위기의 토대다. 여기에 한국영화의 서사 위기가 얹힌다.

근대적 서사의 위기

극장의 역사를 장황하게 쓴 이유는 최근 한국 대형 상업영화들에 잠재한 근대성 때문이다. <1947 보스톤>은 그 대표선수다. 기차나 공장이 근대 기계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는 덕분이다. 선임 정비사는 후임에게 고장이 잦은 부품을 알아보는 노하우를 전한다.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밤 9시, 1초의 오차도 없이 뉴스를 시작하는 노하우를 신임 담당자에게 교육시킨다. 후임은 이를 기계처럼 수행하도록 훈련받는다. 학교는 한때 기성세대의 지식과 가치관을 미래세대에 전수하는 기관이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아랫세대는 윗세대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면 성취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공부하면 진학과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고 선배가 알려주는 대로 일하면 승진할 수 있었다. 인생에 도움이 됐다. 윗세대는 그래서 존경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통하지 않는 시대의 속도는 오늘날 개발국가 전반이 겪는 일이지만, 한국의 사정은 보다 특수하다. 아랫세대는 다리와 건물을 무너뜨린 윗세대를 봤다. 압축 성장의 다른 결과로, 개발도상국 인식을 장착한 부모와 선진국에서 자라나는 자녀가 한집에 산다. 24시간 축에서 근면성실하게 살아가자는 어른들과 무한대의 시공간이 펼쳐진 디지털 세계를 사는 아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중장년층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삶의 방식과 노하우를 미래세대도 배웠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1947 보스톤>은 이에 대한 판타지다. 근대가 형성되던 시기의 한국, 선배(하정우)가 후배(임시완)를 가르치며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이루는 이야기. <더 문>에서는 전임 센터장(설경구)-황선우(도경수)가 같은 역할을 맡았다.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의사결정 대부분은 중장년층이 내린다(그들 중 다수는 민주화 시대를 이끌며 30대부터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2023년 한국영화에서 유사 부자 서사가 되풀이되는 데는 이런 맥락이 있다. <더 문>은 올여름, <1947 보스톤>은 추석 시즌 한국영화 가운데 최대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모두 2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이 서사에 누군가가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능력 있지만 현역에 없는 윗세대와 재능 있지만 예의 없는 아랫세대가 다투다 끝내 서로 동화돼 성공한다는 서사. <1947 보스톤> <더 문>과 더불어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에서도 천 박사(강동원)-황 사장(김종수)이 비슷한 구도에 있다. 이들 이야기에서 젊은 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외 없이 사망했고 후견인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한다. 상대적으로 젊은 제작사와 신인감독이 만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의 경우, 황 사장은 아랫세대를 그저 돕기만 할 뿐 ‘꼰대’ 면모가 없다. 강제규 감독의 손기정 선수와 김용화 감독의 우주센터장은 다르다. 가르치고 야단친다. 열정을 바쳐 쌓아온 노하우와 가치관을 전한다는 신념에 차 있다. 반항하던 후배 주인공은 위기 극복 후 선배의 진심에 감복한다.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힘겹게 지나온 중장년층의 욕망이다. 여기에 애국 서사라는 공통점이 더해진다. 애국을 고취하는 데 미국이 장애물로 등장한다는 점도 두 영화가 같다. <더 문>은 미국항공우주국의 비협조로 위기를 제조한다.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뀐 거 말고 뭐가 달라졌냐”는 말로 시작하는 <1947 보스톤>은 국제 마라톤 대회에선 있을 법하지도 않은 미국 선수의 반칙 장면을 굳이 넣어 애국 서사를 돋운다.

위험신호

대형 한국영화의 이같은 의사결정에 젊은 세대는 미온적이다. 주변 청년들을 붙들고 물었다. 22살 이모씨는 지난해 직장을 구했다. 수입이 생기고부터 20차례 넘게 극장에 갔다. 올여름엔 <더 문>과 <밀수>를 봤다. 이후 현재까지 한국영화를 택하지 않게 됐다. “<더 문>의 작위적 신파에 실망했다”는 그는 <1947 보스톤>의 줄거리에서 “한국영화 특유의 억지 감동 포인트가 나올 것만 같아”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헤어질 결심>과 <유령>을 흥미롭게 봤다는 23살 신모씨. 올여름과 추석을 통틀어 한편의 한국영화도 선택하지 않았다. “SNS에서 관람 후기를 보면 ‘한국식 신파’가 나오거나 대부분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일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34살 엄모씨도 여름 시즌과 추석 연휴 한국영화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는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를 본 마당에 <더 문>을 볼 이유를 찾지 못했다”면서 “다른 영화들도 시간과 비용을 들이기엔 뻔하거나 격투 장면만 나올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이들의 답변이 올해 대규모 한국영화가 내린 의사결정의 판단 착오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더 문>은 가족영화로서 <신과 함께> 시리즈를 메가 히트시킨 감독의 작품이고, <1947 보스톤>은 그 내용상 명절 연휴 중장년층 관객을 중심으로 가족 단위 관객의 호응을 노렸을 터다. 결과는 싸늘했다. 젊은 세대 중심의 온라인 입소문에서 탄력받으며 손익분기점 돌파가 확실시되는 <30일>과는 대조되는 대목이다. 이는 <1947 보스톤> <밀수> <비공식작전> <거미집>의 시대 배경이 한국 사회가 근대성에 머물던 시기라는 점, 각 감독의 노스탤지어가 짙게 밴 이야기라는 점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간 신작이 나올 때마다 기대를 집중시키며 한국영화를 이끌어온 중견·유력 감독들의 결과물은 올해 가장 데시벨 높은 경고음으로 들린다. 종종 한국사회의 폐부를 장르 액션으로 관통해온 한 감독은 몇해 전부터 자신이 욕망하는 장면을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한 프로덕션에만 충실하다는 인상을 준다. 장면이 수단이 아닌 목적일 경우 오래가지 못한다. 깜짝 놀랄 서스펜스 설계와 사회적 참사에 대한 진심을 상업적으로 설득해낸 한 감독은 올해 개봉작에서 예상 가능한 위기-해소 패턴을 반복했다. 어느 쪽이든 할리우드 또는 과거 흥행 공식을 답습한 결과다. <1947 보스톤>은 제조된 위기와 예상된 해소 곡선의 전형을 보인 사례다.

새로운 영토인 OTT는 어떨까. 32살 임모씨는 한글날 연휴 <발레리나>의 초반 10분여를 보다 나가기를 하고 말았다. “또 성착취 복수극이냐”라며 “여성으로서 분개할 소재지만 넷플릭스표 잔혹극으로는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추석 대표작으로 공개된 <도적: 칼의 소리>가 ‘답습한 그림들’의 반복이라는 점 또한 곳곳에서 지적된 바다. 글로벌 OTT가 한국에 원하는 편중적 정서에 시청자들은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영화 위기론’은 그간 뭇 언론에서 흥행 성적만을 놓고 숱하게 제기해왔지만 지금의 위기는 안팎의 실체가 또렷하다. 코로나19가 사회 전반에 걸쳐 앞당긴 근대성 퇴출 경향 속에서 한국영화가 이처럼 갖은 형태의 답습을 계속한다면, 2023년은 부정적 의미의 분기점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압축 성장의 또 다른 결과

우리에겐 저력이 있다. 2019년과 2022년 칸영화제를 취재하며 겪은 반응 차이를 잊지 못한다. 2019년 만난 해외 시네필들은 대부분 “디렉터 팍”(박찬욱)과 “디렉터 봉”(봉준호)을 말하는 정도였다. 코로나19를 지낸 3년 뒤, 칸영화제에서 만난 외국 영화인들은 한국 작품과 배우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화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OTT를 통해 한국 작품들의 저력을 봤다. 한국 안에 원래 있던 것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발견된 것이다. 한국 영화인들은 영화 강국 관계자로 대우받으며 얼떨떨해했다. 많은 영화인들이 자문을 구하는 쪽에서 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다음 소희>의 언론 상영 후에는 눈물을 훔치며 나온 해외 기자들이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나를 보며 “브라보”를 외치기도 했다. <헤어질 결심> 상영 후 열띤 공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압축 성장의 또 다른 결과로, 한국의 작가·감독들은 자기 안에 풍성한 서사를 이미 품고 있다. 분단, 갈등, 범죄, 불평등, 참사를 몸으로 겪고 본 이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성찰을 내놓곤 했다. 한국에 원래 있던 것들이다. 우리 안의 오래된 것들에 미래가 있다. 근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몸에 밴 근성 또한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 제작진의 남다른 점이다. 올해 몇몇 작품들이 실망스럽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는 것들이다. <헤어질 결심>을 침이 마르도록 호평하는 젊은이들은 박찬욱 감독이 환갑을 지냈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윗세대의 작품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낡은 감각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미래세대는 여전히 기성세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 1993년 단성사 앞에 수백 미터의 줄을 세우며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 이후 30년, 질적·양적 성장을 거듭한 한국영화가 이후 어떤 길을 갈지는 앞으로의 몇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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