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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우리’라는 따뜻하고 연약한 말, ‘우리의 하루’

“뜻을 찾지 마.” 삶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이며, 진리는 무엇이냐, 묻는 재원(하성국)에게 홍의주 시인(기주봉)이 단호하게 말한다. 무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무언가의 표면을 바라보고 느끼고 틈을 내며, 온전히 존재하거나 존재감이 희박해질 때까지 밀어붙였던 방식은 홍상수의 세계를 따라온 관객에게도 체험되어온 양식 아닌가. 그래서일까. 재원이 술기운이 도는 채로 진지하게 삶과 사랑과 진리와 같이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물을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관객인 ‘우리’는 관성의 힘으로 웃었던 건 아닐까. 재원의 치기 어리고도 아름다운 질문에 언젠가 나도 되뇌었을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서도,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해져 웃는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신에서 웃지 않은 이들도 많았을 테고 더욱이 홍상수 감독이 유머를 구사하고자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웃음은 즉흥적이지만 때론 덩달아 웃는 경우도 있는지라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관람한 내가 객석의 웃음에 관심을 두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웃음에 관심이 갔던 건 관람 후의 일이 더 크다. 잘 알고 있는 평론가는 <우리의 하루>를 보고 관객이 웃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수렁인가 싶었다. 생각해보면 재원이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데 필수 불가결한 질문을 괴롭게 뱉어내며 “이게 다 뭡니까? 그냥 다 있는 겁니까? 아무 뜻도 없이 그냥”이라고 절실하게 토로할 때 이 진중한 청년의 목소리는 우리 중 누군가의 목소리이기도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청년은 진실되게 살고 싶다더니 술자리의 마지막에서 슬며시 거짓말을 하며 늙은 시인을 심심하게 두고 나오지 않는가.

작은 존재들의 큰 힘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의미를 찾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면서도 <우리의 하루>의 제목에 대해서만은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다. 이 영화엔 수많은 ‘우리’의 ‘하루’가 있다. ‘우리’라는 고양이와 상원(김민희), 정수(송선미), 지수(박미소)로 이뤄진 ‘우리의 하루’, 홍의주, 재원, 기주(김승윤)로 이뤄진 ‘우리의 하루’ 그리고 <우리의 하루>를 보는 관객 ‘우리의 하루’다. 홍상수 영화에서 드물게도 상원의 이야기와 홍의주의 이야기는 교차로 진행될 뿐 서로 겹치지 않는다. 그의 단순한 영화 중에서도 지극히 단순한 형식을 지닌 영화며 카메라 움직임도 적다. 마치 두개의 ‘우리’의 얼마간 비슷한 상황의 삶의 단면을 한 단락씩 나눠서 교차로 배열하며 두 이야기 사이에 세부적인 접점을 만들 뿐이다. 가령 손님이 방문하고 고추장을 타 먹는 라면과 선물과 기타가 등장하며 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이상한 인상이 든다. 이 영화는 분명 교차로 진행되고 있으나 교차 진행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게 만든다. 정수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오로지 정수, 상원, 지수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영화 같다가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시인의 방에 있는 이들만이 이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교차편집하는 영화에서 한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이야기를 잠시 잊는 일이 다반사이기는 해도 <우리의 하루>는 사실 서로의 이야기를 잊기 어렵지 않은가. 상원과 홍의주 시인에게는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손님이 어떤 형태로든 조언을 구하기 위해 집으로 방문하고, 둘은 특이한 식습관을 내보이며, 더욱이 두 인물은 서로 비슷한 태도의 발언을 하는데 즉각적으로 연결점이 이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론 연결점은 있다. 그런데 연결점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기질을 가진 두 주체가 영화라는 틀 안에 따로 기거하고 있다가 같은 바람을 맞으면 비슷하고도 다른 잔향을 남기는 것 같다.

그 잔향 속에서 느껴지는 건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고 솔직하기도 하며, 불안하기도 고독하기도 충만하기도 한 모습일 테다.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런 인물들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결속력 없이 ‘우리’라는 범주에 인물들을 넣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인물들은 만나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장력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의 숏에 어떤 힘도 행사하지 않기에 일정한 구조라는 것조차 생겨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 물끄러미 인물들의 삶의 단면을 바라보고 충만하게 느끼고 에피소드를 만들어 작은 존재들의 큰 힘을 마주쳐보고자 하는 소망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이를테면 정수에게는 고양이 ‘우리’가 사라지는 일이, 홍의주 시인에게는 술을 마시는 일일 테다.

단순히 보아도 좋은 것

홍상수 영화의 숏들은 아무리 이 숏과 저 숏이 떨어져 있어도 큰 구조 안에서 이어지거나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우리의 하루>는 순차적으로 나열된다. 다만 상원의 이야기가 아침나절부터 밤까지 진행되는 데 반해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는 집약적이다. 그 때문인지 두 이야기는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날카롭고 깊게 팬 이야기는 홍의주 시인의 이야기에 담겨 있고 이를 상원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감싸고 있는 인상이다. 말하자면 교차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 보고 나면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을 거쳐 홍의주 시인이 위스키와 담배를 흐뭇하고도 고독하게 마주하는 장면에 도착하는 이야기 같다. 그리고 또 다른 하루가 올 것이다.

‘우리’는 따뜻하고도 연약한 말이다. ‘우리’의 범주는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그 범주에서 빠져나오기도 쉽다. <우리의 하루>는 상원의 ‘우리’가 함께 밤에 술자리를 갖는 것으로 끝을 맺고 홍의주 시인이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두 술자리 중 누가 더 충만해 보이냐고 묻는 건 우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와 같다. 홍상수 감독이 갑자기 우리가 감정이입할 만한 영화를 힘껏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 애쓰고 솔직해지려고 하나 거짓말도 하고 삶에 나태하기도 하고 충실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기쁘기도 고독하기도 한 그런 작은 존재가 있다. 그런 존재들이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보낸다. 이 단순한 영화를 보면서도 누군가는 미지의 문을 열 듯 눈을 번뜩이며 발견을 향해 나아가겠지만, 단순히 보아도 좋은 게 있는 것 같다.

원래부터 홍상수 영화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기 더욱 힘들어졌다. 강력한 영화 앞에서 이상하게 느낀 바를 반복해 지적하거나 다른 지점을 짚으려다 종종 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글은 나왔고 훌륭한 비평 또한 많았다. 하지만 비슷한 불안감이 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지점을 반복해서 지적한다는 자신의 감각에 대한 불안감 말이다. 이 영화 앞에서 나는 속이 후련했다. 둔한 평자가 될지언정 느낀 그대로 본 그대로 이상한 감흥의 실체를 찾아 헤매지 않고 솔직하게 써도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의 하루>는 ‘우리’의 ‘하루’가 예리하고도 두텁게 내려앉아 있는 영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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