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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 섹션: 잡지로 모임하는 사람들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는 그들 대부분 독자를 실제로 거의 만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인에게 읽히는 잡지를 만드는 그들이 정작 독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은 좀 아이러니다. 이유는 별것 없다. 쉴 새 없이 또 다음 잡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잡지 만드는 사람들은 유독 여유가 없다. 이번이 끝나면 또 다음으로. 다음이 끝나면 또 다음으로. 그러다 보니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쉽게 지친다. 잡지를 만든다는 일은 수많은 마감과 편집의 감옥 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동시에 그들은 종종 내가 하는 서점에 찾아와 자신의 글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고 버려지는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마치 끊임없이 응답을 기다리며 기도하지만 동시에 응답을 듣지 못해 불안해하는 구도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잡지를 만드는 존재와 읽는 독자가 만나는 모임은 독자를 위한 행위인 것 같지만 사실 만드는 존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많든 적든 실재하는 독자를 만난 창작자는 하나의 계시를 가슴속에 담아두고 더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마감의 굴레에 있는 창작자에게 연료를 더 지피는 게 올바른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래지 않은 어느 날의 이야기다. 한 문학잡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청했다. 모임이 얼마 남지 않고 참석이 어렵다는 몇통의 문자를 받았다.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잡혔습니다.” 모임을 기획하다 보면 오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수많은 사유를 반복해서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서운하기보다 어떤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힘든 야근을 했다거나 몸이나 마음의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이유와 사유가 무엇이든 쾌유와 안정을 바라게 된다. 물론 아무 말 없이 나타나지 않아 조금 난감해진 적도 있었지만 서점 5년차가 되고 나니 그런 사람들도 있으려니 하고 사람을 모으게 된다. 기대가 없다면 불만도 없는 법이고, 희망이 없다면 비관도 없는 법이다.

하지만 유난히도 그 모임은 참여가 어렵다는 연락도 적었고, 연락도 없이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인데도 서점은 잡지를 읽은 사람들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다름씨는 조금 떨린다고 했다. 출판 관련 행사는 많이 참여해봤는데 잡지로 독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얼마나 만드셨는데요. 8년 정도? 8년 만에 독자를 만나는 건가요. 그건 좀 직무 유기 아닌가요. 만들어보기나 하고 그런 말씀하세요.

발을 오돌오돌 떨던 편집장은 아주 중대한 문제인 것처럼 내게 물었다.

이 모임 유료예요? 돈 내고 신청하는 모임인가요?

그런 건 미리 알고 오시지 않나요.

죄송해요. 갑자기 궁금해서요.

왜요. 무료 모임이면 대충 하고 가시려고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진짜 궁금해서요.

편집장은 돈을 내는 모임이든 돈을 안 내는 모임이든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다. 아니 그럼 사람들이 돈을 내서 모임을 신청할 이유가 없잖아요… 죄송해요.

오늘 모임은 다름씨가 만든 잡지를 읽은 분이면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이라고 알려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잡지를 읽고 이렇게 많은 분이 오셨다니 놀랍네요.

여전히 편집장은 발을 떨었다. 속으로 저렇게 발을 계속 떨면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복도 다 나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학잡지 편집장의 위엄도 있을 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복이고 위엄이고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어떻게든 많이 읽히는 게 복이고, 어떻게든 많이 닿는 게 미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찰나 떨림이 멎었다.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고요하게 있었다. 이런 순간에 시작을 알리는 일은 너무 부담돼 싫어하지만 이 일은 나의 서점에서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훌륭한 소설 첫 문장이 몰입을 이끌어내고 잡지의 위트 있는 커버가 페이지를 넘겨보게 하는 것처럼. 누군가 잘 모르는 주제를 마중나와 쉽게 풀어 기다리게 하는 일. 이 행위는 잡지와 무척 닮아 있다.

모임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끝났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기억에 남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잡지도, 위대한 책도, 세상을 뒤흔들 강연도, 치열했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어떤 문장은, 이미지는, 찰나는 불멸하기도 한다. 그날 편집장이 또렷한 활자가 아닌 떨리는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단행본 편집을 하면서 잡지를 함께 낸다는 건 정말 힘들고 고단한 일이에요. ‘아, 내가 문학잡지를 8년째 만들고 있구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날이 있어요. 또 어떤 날에는 ‘문학잡지를 8년째 만들고 있어’ 하는 마음이 긍정적으로 들 때도 있고요.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아마 알아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어려움과 별개로 잡지를 만들 때마다 피가 도는 기분이 들어요. 편집자란 일이 작가와 일대일로 교감해야 하는 일이라 다른 팀원들 보기가 힘든데 잡지를 만들 때만큼은 편집부가 함께 모여 교감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고요. 시나 소설 단행본을 꾸준히 내는 것도 물론 문학을 쌓아가는 일이겠지만 문학잡지야말로 가장 문학적인 행위가 아닐까요. 잡지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지키고 싶은 가치에 대한 맥락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으니까요.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다름씨가 이야기한 내용을 뜨문뜨문 떠올리고 왜곡하여 기록하며 한권의 잡지에 들어가는 수많은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커버로, 산문으로, 에세이로, 시와 소설 그리고 인터뷰로 에둘러 말하고는 있지만 단단하게 그리고 강경하게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명징하게 밝히고 있다. 가끔은 이토록 밝은 길을 활자가 아니라 창작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서만 이해한다는 반성도 들지만, 이제는 자존심을 지키려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며 침묵하며 고개를 흔들기보다 촌스러워도 직접적인 목소리로 깨닫는 편이 낫다며 자위해본다.

잡지들이 만드는 길은 독자를 위한 길이지만 함께 만드는 동료와 창작자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들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새로운 독자가 자신들의 세계에 편입되기를 바라고 있다. 수많은 행성 중에 어떤 자장에 몸을 던질지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