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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 위에 관객, 김성찬 평론가의 <프레디의 피자가게>
김성찬 2023-12-06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11월15일 개봉 이후 현재(11월2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일 관객수 1위를 이어가며 약 37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물론 최근 극장가가 침체에 빠진 상황인 만큼 절대 수치는 높지 않다. 다만 <씨네21> 1432호 기획 기사 ‘마블은 길을 잃었나’가 확인해주었듯 <더 마블스>가 맥을 못 추는 건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는 것과 달리, 절대적 인지도가 부족한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흥행 1위를 이어가는 현상은 분명 주목을 요한다. 이건 북미에서 더욱 눈에 띄는 상황으로 영화는 10월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제작사 블룸하우스 역대 오프닝 1위를 기록했다. <더 마블스>가 흥행 부진에 빠진 것도 비슷한 양상이다. 이쯤에서 궁금하다. 대체 이 작품의 무엇이 까다로워진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을까.

게임이 영화가 된다는 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게임을 영화로 보려는 관객의 욕망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근간이 있다. 하나는 위탁된 행위성이다. 창작자가 만들어낸 하나의 완성품이 영화라면 관객은 수용 여부만 결정하는데, 게임은 게임 참여자가 능동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완성에 이른다. 이때 게임 참여자, 즉 게이머의 행위성은 자주 위탁된다. 그렇지 않다면 유명 동영상 플랫폼에서 타인이 수행한 게임의 영상을 그리 열광하며 감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의 영화화란 위탁된 행위성을 스크린으로까지 확장한 사례다. 또 여기서 수탁자는 등장인물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서사를 향한 갈망이다. 게임은 게임 참여자의 행위로 매번 다른 서사를 낳는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게임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틀이라는 디자인된 서사 안에서만 변주될 뿐이다. 주지하듯 게임에서 느끼는 쾌감은 제약과 함정을 극복하는 데서 오는데, 이 제약과 함정은 고정돼 있다. 특히 경비실에서 CCTV 화면을 확인하며 초자연적 기운의 영향으로 움직이는 애니메트로닉스(기계인형장치)가 경비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전력을 개폐하는 단순한 조작이 전부인, <프레디의 피자가게>의 원작 게임 <파이브 나이츠 앳 프레디스>(Five Nights at Freddy’s)처럼 기본 설정 외에 서사가 숭숭 뚫려 있고 채워야 할 공백이 많아 게이머들이 다양한 추측을 하도록 한다면 완성된 서사를 향한 갈망도 게임을 스크린으로 호출하는 원동력이 된다.

중요한 건 그래서 <프레디의 피자가게>가 관객의 욕망을 충족하는 만듦새를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작품성을 인정받지는 못한 듯하다. 절대 기준은 아닐 테지만 11월22일 현재 IMDb 평점 5.5, 로튼토마토 평론가 점수 30%로 저조하다. <씨네21> 전문가 별점은 4.75를 기록했고, 네이버 관람객 평점은 6.89다. 특히 관람평을 보면 게임을 아는 사람은 반갑다며 고점을, 게임을 잘 몰랐던 관객은 공포영화로서 제 기능을 못한다며 저점을 준 점이 특기할 만하다. 앞서 말한 게임의 영화화를 이루는 두 가지 근간에 맞춰보면, 우선 행위성을 위탁받은 주인공의 활약이 미약하다. 애니메트로닉스와 이를 저지하는 등장인물의 움직임이 부각되어야 했을 텐데 점프 스케어만 몇 차례 등장할 뿐 장르 기법은 좀처럼 없고 주인공의 심리에 집중하느라 실시간으로 게임을 수행하는 모습을 감상한다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린다. 서사를 향한 갈망도 비슷하다. 애니메트로닉스가 사람을 습격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게임 서사는 마스코트 호러라는 언사에 부응하며 명랑함과 공포의 낯선 만남이라는 자장에서 신선한 이야기로 도출될 수 있었을 텐데 정작 작품은 주인공의 트라우마에만 골몰하며 범속한 이야기로 흘러 서사 기술 면에서 게으름마저 꼬집게 된다.

전도된 관객성

그렇다면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게임을 영화화했다는 화제성만으로 관객에게 소구했다고 보면 될까. 여기서 관점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낀다.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영화가 게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게임이 영화를 호명했다고 봐야 한다. 크리스티앙 메츠식의 관객성은 관객이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심리, 배경, 이데올로기까지 모든 면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관객의 수동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디의 피자가게>에서 발견하는 관객성은 다르다. 작품이 영화로 나오기 한참 전부터 인터넷 공간, 특히 서양권에서는 원작 게임에서 추출한 인터넷 밈이 성행한다. 동영상 플랫폼에 원작 게임 관련 밈을 검색해보면 밈을 리뷰하는 영상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접하게 될 것이다. 또 이 밈들을 양산한 사람들은 게임의 컨셉을 그대로 밈화하지 않았고 명랑함과 공포의 낯선 만남만을 취사 선택해 그 양상을 확장한다. 바꿔 말해 <프레디의 피자가게>의 흥행은 관객의 능동성이 현시한 사례라 할 것이다. 팬덤을 넘어 대중오락으로까지 발전하도록 한 원작 게임을 둘러싼 열기와 욕망이 유무형의 압력으로 작용해 스크린에 게임 관련 영화가 걸리게까지 만든다. 그리고 관객은 그 결과물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때 영화의 작품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보다 게임 화면이 스크린에 투사된다는 사실, 유명 공포게임 유튜버가 택시 운전사로 카메오 출연한다는 사실, 여러 이스터 에그가 깨알같이 박혀 있다는 사실 등 초라했던 지점에서 출발해 점차 거대하게 부풀어온 농담이 돈을 주고 티켓을 끊고 들어간 영화관이란 엄숙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일만이 재미와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동한다. 요컨대 자기도 모르게 참여한 대중오락 운동의 영향력을 무의식중에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러니 <프레디의 피자가게>의 관객층이 주로 전 세대보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사용하고 활용하는 데 친숙한 10대와 20대라는 점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누구보다 이 세대에 수동적인 관객을 상정한 과거의 관객성은 폐기된 지 오래다. 다만 능동적으로 전도된 관객성을 좀처럼 목격하기 어려웠다면 <프레디의 피자가게>는 그 실증 사례가 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10대와 20대 관객은 영화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다.

알튀세르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조건의 재생산 역할을 하는 기제를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설명한다. 또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는 학교와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가 일방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시민은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수동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관객성은 능동성을 바탕으로 미디어를 조종하려 든다. 알튀세르를 운운하는 게 거창하다 하더라도 영화산업의 침체 속에서 <프레디의 피자가게>를 관람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건 무시하기 어렵다. 사회구성체를 떠받드는 조건의 변화를 야기하는 활동일지 모른다고 하면 과대평가일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 분명 관객이 무언가를 바꾸려 한다는 의지만은 분명히 읽힌다. 이러한 동태를 기존의 관객은, 영화산업은, 영화 현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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