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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애도의 기회, 애도의 자격, ‘물비늘’
정재현 2023-12-08

정신분석학자 존 볼비는 애도의 과정을 4단계로 요약했다. 충격과 무감각의 시기, 좌절과 분노의 시기, 와해와 절상의 시기 그리고 마침내 재조직과 회복의 시기. 볼비에 따르면 <물비늘> 속 가족과 친구를 잃은 예분(김자영)과 지윤(홍예서)은 3단계에 고착해 있다. 예분과 지윤은 열길 물속 같은 컴컴한 슬픔 속에 살지만 <물비늘>은 내내 우울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비늘>은 애도의 끝인 4단계, 재조직과 회복이 반드시 기다린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임승현 감독이 쓰고 연출한 장편 <물비늘>에 관한 짧은 리뷰를 전한다. 그리고 예분과 지윤을 연기하며 깊은 애도의 강에 빠져 지냈던 김자영, 홍예서 배우와 나눈 이야기도 동봉한다.

죽은 자의 염습 과정은 산 자의 외출 준비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씻기, 단장하기, 옷 입기, 인사 나누기. 슬픔의 무게를 온전히 겪을 새 없이 바쁜 장례식의 유족에게 굳이 염습의 과정을 지켜보게 만드는 이유는 애도의 시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애도는 목놓아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땅 밑으로 가는 길도 일상의 과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남은 자를 안심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분(김자영)은 장례의 전체 과정 중 염습을 전담하는 장례지도사다.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숱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애도의 기회를 제공했을 예분이지만, 그에겐 정작 애도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예분의 손녀 수정(설시연)은 1년 전 강가에서 래프팅을 하다 참변을 당했고 유해는 온데간데없다. 예분은 애도할 기회를 직접 찾아 나선다. 예분은 주변의 만류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손녀가 떠내려간 강물에 직접 입수해 금속 탐지기를 들고 수정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수정과 함께 래프팅을 한 지윤(홍예서)도 상실의 급류에서 허우적댄다. 촉망받는 수영선수였던 지윤은 사고 이후 물속에서 숨 쉬는 일이 두렵기만 하다. 지윤은 함께 살던 할머니 옥임(정애화)마저 잃는다. 아직 미성년자인 지윤 대신 옥임의 시체를 수습하고 장례를 진행할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에서 지윤의 애도의 시점은 무한정 유보된다. 예분은 옥임의 유언대로 보호자가 오기 전까지 지윤을 거두고 둘은 공동의 애도에 돌입한다.

나의 애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예분과 지윤의 기억 속에 망자의 모습보다 또렷한 건 망자를 향한 부채감과 죄의식이다. 예분과 지윤은 수정의 죽음에 본인이 연루됐을 거란 자책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주변인들은 “그만큼 했으면 됐다”며 예분과 지윤이 수행 중인 애도의 기회와 자격을 박탈하려 든다. 예분과 지윤이 슬픔의 수심에서 조속히 회복하길, 예분과 지윤의 추도가 무고하고 무해하길 강요한다. 그러나 고통 앞에 무고한 사람은 없다. 예분과 지윤은 자기 아픔에 골몰해 있느라 같은 고통을 앓는 서로에겐 무감하다. 예분은 사고 생존자인 지윤이 겪을 트라우마는 덮어둔 채 진실을 말하라며 한없이 지윤을 몰아세우고, 자신을 도우려는 주변의 성의를 애써 모른 척한다. 지윤 또한 예분이 참척의 고통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본인만이 전할 수 있는 한줌의 진실을 꺼내길 주저한다. 수정의 죽음 앞에 여러모로 결백하지 않은 예분과 지윤은 그럼에도 자기 앞의 슬픔을 헤치며 애도의 몸부림을 쳐간다. 그리고 애도할 기회와 자격을 몸소 찾는 예분과 지윤은 가만히 있으라던 남들과 무관한 시점에 고통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난다. 끝도 답도 없는 고통에 맞서는 예분과 지윤의 모습은 의문의 재난이 산재한 사회에 사는 대한민국 관객의 부채감을 건드린다. ‘스러지던 목숨 앞에서 나는 무얼 할 수 있었나?’ ‘나의 애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끝내 참사의 결과를 바꾸지 못하는 무수한 가정들이 허망함을 불러도, 애도를 위한 예분과 지윤의 전력투구는 관객에게 낯선 위로를 건넨다. 고통 앞에 순결하지 않아도, 슬픔을 타개할 힘이 미력하대도 괜찮다고. 애도의 기회와 자격은 슬픔의 당사자가 직접 찾아 나서는 거라고. 나의 애도가 세상은 못 바꿔도 괴로움 속에 사는 곁의 누군가는 돌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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