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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영화 키워드, 2023년 한국영화는 ‘엔딩 포즈’다

<더 문>

올해 한국영화 속 인물들은 절박한 가운데 겨우 숨 쉬곤 했다. 그 모습은 아이돌의 엔딩 포즈와 유사하다. 호흡을 고르는 기색조차 없이 천연덕스럽게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아이돌 가수의 세계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소진을 증명하는 거친 숨소리가 제스처를 압도한다. <거미집>에서 감독 김열은 이미 촬영을 마친 영화의 엔딩을 다시 찍기 위해 배우와 스탭을 도로 불러모으는 기행을 벌인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친 김열의 엔딩 포즈는 카메라를 등진 채 감독 의자에 앉은 뒷모습이다. 카메라가 서서히 다가서면 그의 머릿속에 영사되는 사건이 플래시백 형태로 드러난다. 이때 화면을 잠식하는 거친 숨소리는 플래시백의 비밀보다 크다. 그 숨소리는 생존의 증명으로도,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는 호소로도 들린다.

이러한 분석을 한국영화로 확장할 때 아이러니한 것은, 거친 숨소리가 희박한 공기 속에 스스로를 내몬 결과라는 사실이다. <밀수>의 바다와 <더 문>의 달처럼 공기가 희박한 공간은 영화가 처한 위기 상황을 드러내는 무대처럼 보인다. 다만 <밀수>는 위기에 특화된 해녀를 주인공으로 삼으며 기회로의 전환을 노린다. 해녀들과 함께 위기 속에 풍덩 빠진 영화는 거슬러 오르는 호흡과 몸짓을 스스로 구한다. 반면 <더 문>은 한 유약한 인물을 달에 고립시키며 위기를 의인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인물을 자발적으로 위기에 빠뜨려놓은 채 그를 구해달라고 대중과 세계시민에게 호소하는 영화는 흡사 자가당착적 공익광고처럼 보인다. 그 숨소리는 넘치도록 절박하지만, 마음을 움직이진 못한다.

한국영화는 뛰고 또 뛰었다. 그저 최선을 다했음을 증명하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라올 거라 믿는 시대착오적 기획이 아찔하게 이어졌다. ‘꿈은 이루어진다’로 압축된 2002년 월드컵 성공 신화는 <드림>에서 오합지졸 홈리스 축구부원들의 성공적인 실패로 부활한다. 하지만 이들의 진심은 <괴인> 속 ‘월드컵 세대가 나라를 망친다’로 요약되는, 억지와 통찰을 버무린 뭉툭한 한마디로도 속절없이 무너진다. 영화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 승리하는 서사를 그리고 싶어 하지만, 그건 오히려 현실의 실패를 가리는 기만처럼 느껴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진짜 승리자가 영탁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실패라기보다는 교조적 결말에 대한 구원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의 봄>에서 바뀌지 않는 실패의 역사 틈바구니에 삽입된 선한 사람 이태신의 진짜 대결 상대는, 전두광이 아니라 어쩌면 영탁이다.

영화가 관객과 함께 뛰기 위해서는 이율배반적인 두번의 숨소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지옥만세>와 <다음 소희>는 주인공의 숨소리로 시작하고 끝난다. <지옥만세>에서 반복된 숨소리는 왕따라는 이름의 폭탄 돌리기가 행해지는 엄혹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리지만, 두 번째 순간만큼은 타임 슬립의 주인공처럼 용감하게 맞서리란 믿음을 준다. <다음 소희>에서 홀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소희의 춤 연습 장면은, 부고장처럼 날아든 작은 프레임 속 영상으로 돌아온다. 묵음 처리된 영상의 고요함은 인물의 숨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던 첫 장면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영상을 보던 유진의 낮은 흐느낌과 숨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태를 보존하면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한다. 같은 숨소리가 다르게 들릴 때 혹은 다른 숨소리가 서로 공명할 때, 비로소 영화와 함께 살아냈다는 감각에 얼얼해진다. 관객이 영화의 호흡에 동참하는 순간은 이처럼 시차를 인정한 뒤라야 오는 찰나의 행운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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