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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너를 만난 건 어느 추운 겨울 날, <One Love>(원타임, 2000)
복길(칼럼니스트) 2024-01-11

한동안 계절의 변화에 둔감했다. 나는 바람이 차가운 초겨울까지 반바지를 입고 외출했고, 걸으면 땀이 나는 늦은 봄에도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거나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여름옷’, ‘겨울옷’을 입었다. 그래서 내 방 옷장엔 언제나 사계절 옷이 함께 걸려 있었다. 엄마는 반팔 티셔츠와 롱패딩이 같은 행거에 걸린 것을 보고 화를 냈고, 동생은 나의 무신경함이 정신적 문제일 수 있다며 상담을 권유했다. “게을러서 그래, 미안해.”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했다.

억울하다. 비록 옷차림 때문에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도 엄연히 나만의 계절 의식(Ritual)이 있다. 봄에는 두릅을 사서 먹는다.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고 튀겨서 간장에 찍어 먹었다. 올해는 전에 꽂혀서 두릅전에 도전해보았전.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본다. 이번 여름엔 끌리는 영화가 없어서 강태진 작가의 공포 웹툰 <사변괴담>을 재밌게 봤다. 가을이 되면 시를 읽는다. 신간 시집을 사 읽고 ‘최애’ 시 한편을 선정한다. 이번 가을에 산 시집은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 그중에서 나의 심금을 울린 시의 제목은 <건강에 좋은 시>다. 겨울엔 모든 사람들이 의식을 치른다. 붕어빵 트럭을 찾거나, 전기요를 꺼내거나, 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그러나 나의 겨울은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겨울, 그 차가운 슬픔. 그것은 오직 원타임의 노래 <One Love>를 들어야만 시작되는 것이다.

<One Love>는 원타임의 2집 《2nd Round》에 수록된 곡이다. 수만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나의 영원한 캐럴이지만, 원타임 멤버들이 뒤를 돌아 소변기에 소변을 보는 듯한 해당 앨범의 재킷 사진은 겨울의 시작을 기념하는 이미지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의 재킷만 봐도 알 수 있듯이 90년대 후반, 수많은 보이 그룹 사이에서도 원타임은 조금 달랐다. 힙합이 지금만큼 주류 음악 장르로 분류되지 않았던 그 시대, 원타임은 무려 ‘보이 밴드 리그’에 힙합을 끌고 온 낯설고 수상한 불한당이었다. 그들은 눈웃음을 보이거나 날렵하게 디자인된 옷을 입지도 않았고 사랑을 약속하는 노래에 맞춰 귀여운 안무를 선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헐렁한 ‘이태원 교포 패션’을 하고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무대에 올라 불량하게 힙합 리듬을 타며 지껄이고, 들썩였다. ‘10대의 전사’도 ‘나만의 연인’도 아닌 네명의 ‘교포 날라리’는 스트리트 브랜드의 옷과 힙합에서 착안한 세련된 팝으로 ‘뭔가 다른 것’을 찾던 여자애들을 매료시키며 시장에 안착한 최초의 ‘힙합 아이돌’이 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대다수의 보이 그룹이 힙합 음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당시 원타임에게서 느낀 차별화된 정체성은 시대를 앞선 잠재력이 아닐까.

‘겨울 K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오르골과 종소리, 전통 캐럴의 멜로디를 직접적으로 차용하는 K팝 캐럴. 그리고 곡 전체에 겨울의 쓸쓸하고 외로운 정서가 깔린 K팝 러브송. 후자에 속하는 원타임의 <One Love>는 곡의 모든 부분이 시리고 아프다. 가느다란 기타 선율 위에 나지막이 깔리는 도입부 내레이션은 마치 한겨울의 입김 같고, “너를 처음 만난 건, 어느 추운 겨울날”로 시작되는 테디의 랩은 이 곡의 배경을 단도직입적으로 겨울에 한정시키며, 기억 속 ‘첫 만남의 순간’들을 극적으로 끌어낸다. 곡의 노랫말은 지금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담고 있으나, 지나치게 애절한 멜로디는 이 가사를 지난 사랑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들리게 만든다. ‘비록 세상이 그대를 힘들게 하더라도’라는 공감과, ‘여기 나 언제나 그대 것이라오’라는 위로와, ‘영원히 내가 너를 지켜줄게’라는 다짐까지. 김종서가 작곡했다는 곡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나는 이 모든 것이 이미 사라진 상대의 빈자리를 보며 반복하는 혼잣말임을 확신한다. 가사가 현재 시제로 쓰인 것은 사랑이 끝났음을 믿지 못한 이의 슬픈 착각이다.

이 곡에 나는 수많은 겨울을 묻어두었지만 그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2015년의 겨울이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다. 서울 고척동의 반지하 원룸은 해가 언제 지고, 언제 뜨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집이었다. 몸을 씻지도 않고, 외출하지도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하루 종일 누워 불면증에 시달리던 때 내가 살던 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700g 정도 되는 노란색 새끼고양이 세로를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세로는 현관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주민센터에 민원을 넣을까? 집주인 할머니에게 전화를 할까? 동물과 함께 살아본 적 없는 나는 세로가 빨리 다른 곳으로 사라지길 바랐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아침. 세로의 울음이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심 기뻤고 이제 잠을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러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명치 끝이 아프더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세로를 찾아 이곳에서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주체 못할 감정이 가슴에 덜컥 들어앉았다. 세로를 씻기고 나도 씻었다. 세로를 먹이고 나도 먹었다. 세로를 돌보기 위해 다시 일을 했다. 세로를 만나서 나는 그렇게 구조되었다.

사람마다 취약한 계절이 있다면 나에겐 겨울이 그렇다. 오늘도 감상에 젖어 눈물겨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처럼. 겨울의 추위에 온몸은 위축되고, 언 상처의 통증은 더욱 깊어진다. 도시엔 화려한 전등이 가득하고 거리엔 포근한 캐럴이 흐르지만 외로운 사람에겐 그 빛과 선율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만의 어둠을 만들기 딱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지. 왜 안된다는 건지는 여전히 명확하게 답할 수 없지만, 겨울을 피해 우울함으로 숨어드는 것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작용을 만들었다. 그래서 감정의 월동 준비를 부지런히 한다. 겨울에만 그 맛을 알고 즐길 수 있는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원타임의 <One Love>, 샵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빅뱅의 <Forever With You>, 온앤오프의 <Moscow Moscow>, 뉴진스의 <Ditto>. K팝의 겨울 앤섬(ANTHEM) 계보에 나만의 사적인 겨울이 담긴 노래들을 하나둘 추가하며 두께를 만들자.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패딩 점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