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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가장 미움받은 정치인,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김수민 2024-01-18

<길위에 김대중> 개봉을 계기로 돌아보는 한국 정치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어느 프로그램 진행자가 한 패널에게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누구인지 물었다. “김대중 대통령이요.” 진행자가 말하길, “너무 무난한 답이라 정치 성향을 짐작할 수 없네요”. 격세지감이다. 김대중은 한국 정치인 가운데 크고 많은 중상모략을 당했다. 1959년 강원 인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그는 공산당원이라는 허위 선동에 시달렸다. 처음 대선 후보로 나선 1971년에도 색깔론은 거셌다. “동네에 ‘빨갱이’라는 말이 자자했고 벽보는 훼손되었다.” 내 어머니의 회상이다. 경북 태생인 나는 어릴 적 어른들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박정희를 비판할 수는 있었으나, 김대중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곤란한 일이었다. 대선에서 세 번째로 낙선한 그가 은퇴를 선언한 1992년 12월19일,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씻었다. 어린이라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죽을 고비를 넘겨온 사람이 이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30여년이 지났다. 2023년 11월에 실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구·경북 지역의 김대중 긍정 평가율은 부정 평가율의 3배 이상이었다.

경영자에서 정치인으로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0년 9월 김대중은 목포에서 인민군에 처형당할 뻔했다. 해운사 경영자인 그는 인민군에 ‘반동분자’였다(김대중은 한국 최초의 CEO 출신 대통령이다). 해방 정국기에 잠시 있었던 조선신민당은 애초 비공산 계열 정당이었다. 소련 추종자들이 불어나자 김대중은 그들과 대판 싸우고 탈당한다. 그는 1950년대 중반 기고문에서(김대중은 한국 유일의 시사평론가 출신 대통령이다)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라며 소련식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일본을 태평양 반공동맹의 중추로 지목하며 한일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1971년 4월 대선에서 김대중은 평화통일을 주창했다가 대대적으로 친북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김대중의 ‘4대국(미국·일본·중국·소련)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론’은 제목 그대로 우방국의 지지를 중시했다. 데탕트를 연 헨리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은 그로부터 석달 뒤였다. 김대중은 반 발짝 앞서 나갔을 뿐이다. 1980년대 반미 풍조가 퍼지던 동안에는 ‘비폭력·비용공·비반미(3비)’ 원칙을 견지했다.

김대중의 말과 글에서는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물리친다’는 신념이 빈번하게 발견된다. <김대중 자서전>은 김일성을 놓고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독재를 했다”고 적었다. 쿠데타 일당이 그를 용공 분자로 몬 것이 가소롭다.

색깔론은 ‘호남 차별’에 기반하고 있었다. 독재 정권이 1979년 10월 부산-마산 항쟁을 내란으로 모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불과 7개월 뒤 있었던 광주 5·18은 달랐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프레임 씌우기’도 잇따랐다. 냉정하게 전략적으로 따져보자. 호남은 인구와 면적과 개발 수준에서 늘 열세였다. 그가 뭐하러 백전백패할 구도를 짜겠나.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호남 지역 연설을 두 차례만 하고 맺었다. 대광장이 아닌 실내 체육관에서. 호남만의 대통령이 되면 호남인에게 죄짓는 것이라는 요지로. 1997년 대선에서는 호남 방문이 아예 없었다. 당시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인들은 해태 타이거즈 야구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대선에 악재가 되지 않을까 긴장했고, 타 지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오후에 투표했다.

호남은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좌우익간 보복에 시달렸다. 미국의 원조금을 배분받는 데서도 소외됐고 산업화가 경부축에서 진행되면서 경제개발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균형 발전을 서둘러야 할 시점에는 광주 학살을 겪었다. 호남의 설움과 김대중은 불가분이다. 물론 지역 내에서 한 정당이 독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호남인 절대다수의 김대중 지지가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진실이다. 전국 각지의 지역주의 투표 행태를 한데 모아서 보면 이 또한 한국 정치가 급하게나마 균형과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김대중은 1997년 대선에서 김종필과 연합해 간신히 당선됐다. 바로 여기서, 반전이 시작된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러 비난을 받았으나 김대중 정부가 소수파 정부임을 부인할 도리는 없었다(호남 출신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지금도 버겁다). 결국 비열한 강자로 비쳐진 것은 거대 야당과 유력 언론이었다. 색깔론도 녹아 무너졌다. 민주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진심으로 빨갱이라 믿는 것은 자신을 갉아먹는 짓이다.

김대중은 정책을 갈고닦아 빛을 내는 역량에서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그 대표작이 개발독재에 맞서며 정립한 ‘대중경제론’이다. 이것이 ‘IMF 사태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와 만나 ‘준비된 경제 대통령’을 빚어냈다. ‘IT 코리아’와 ‘한류’는 김대중 정부에서 출발했고 그는 후기 산업화 및 지식화 시대의 지도자상을 획득한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고교에 입학했던 나는 요즘 고교 또는 대학 동창을 만나면 “2000년대 초입 즈음이 대한민국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는 말을 나누곤 한다. 김대중은 ‘코리안 드림’이고 ‘다이내믹 코리아’였다.

정쟁을 뛰어넘어 존경받다

김대중은 국내 정쟁을 뛰어넘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존경받았고 장쩌민 전 중국 주석에게 ‘따거’(큰형님) 대우를 받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용서한 김대중은 그들보다 더한 독재자인 북한 정권과 대화할 준비를 해두었다. 국군이 서해에서 북한의 도발을 격퇴한 이듬해, 그는 비행기 트랩 위에서 정상회담 맞상대 김정일의 인사와 박수를 받는다. 김대중은 북한 독재자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인민군에 딱 반세기 만에 사열도 받았다. 나는 이토록 웅장하고 화려한 복수를 본 적이 없다. 오늘날 다수 대중은 김대중을 마음놓고 기린다. 또 작금의 세태는 그를 휘감았던 악재들까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가족의 잘못이 불거지자 직접 진상을 확인하고 즉각 국민에게 사죄했다. 야당 총재 시절 같은 당 의원의 돌발적인 비밀 방북으로 안기부의 구인장 발부에 직면했을 때는 당당히 응하며 출두했다. 또 그는 지지자들을 적개심과 혐오로 몰지 않았고 항상 해학과 위로를 겸비했다.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힌 지역 문제를 두고도 “많이 좋아졌다”며 낙관했다.

“지금 가장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김대중이.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언론은 김대중이만 몰아붙이는 이 현실. 이것을 여러분이 방치하지 않고 수백만 인파가 나와서 이 김대중이를 이렇게 격려해주시니, 나는 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1987년 11월 여의도광장 연설이다. “납치돼서 죽음을 모면하고, 바다에서 묶어가지고 던지려는 그 순간을 체험하고, 사형 언도를 받아가지고 옥중에서 가족들을 생각하고 동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산 사람 또 없으니 이런 연설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정치사의 ‘영구 결번’,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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