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시네마 디스패치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 섹션: 기획 회의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선배는 물론이고 동료 에디터 들. 심지어 항상 자기 자리에만 앉아 있던 편집장까지 모두 원탁에 둘러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대화를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마치 녹색 기사를 처음 대면한 원탁의 기사들처럼. 선배만이 눈을 몇번 깜빡이며 어리바리하지 말고 빨리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가면서도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침묵은 깨지지 않는다. 겨우겨우 선배 옆자리에 도착하고 주변을 향해 죄송하다는 의미의 묵례를 몇번 하고 나서야 정적이 깨진다.

편집장은 ‘맛과 요리’ 부서에 어울리는 풍채를 지니고 있지만 둔하거나 무거워 보인다기보다는 듬직해 보인다는 표현이 좀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먹는 것에도 진심이고, 먹는 것에 대해 쓰는 것도 진심처럼 보였다. 에디터들이 가져오는 기사 하나하나 주제를 다시 잡아주고, 표현을 고쳐주고,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마치 파인 다이닝의 요리사가 하나하나 요리하지 않지만 전체 코스를 모두 지휘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편집장을 칭하는 별칭은 ‘르크루제 냄비’다. 스타일리시하지만 전통을 깰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그가 쓰고 있는 주황색 안경도 이 별명이 생기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보니 이 표현은 절반만 맞았다. 그는 제대로 된 기획이 나올 때까지 모든 팀원을 자기 냄비에 넣고 끓이고 있었다. 마치 사골 육수를 끓여내는 것처럼.

답답하네. 다른 잡지들은 새해 주제가 뭐래?

신년 레스토랑 추천 100선.

진부해.

새해 다이어트 레시피.

제정신인가? 무슨 건강 코너인 줄 알아?

원탁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주제가 시기가 빨라서 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혹은 너무 많이 다뤄서, 때론 아무도 다루지 않아서 폐기됐다.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네. 오늘 점심은 내가 하도록 하지. 아침부터 수많은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없애버린 편집장은 벽시계를 바라보면서 전장에서 수많은 적군을 베어버린 장수처럼 처연하게 중얼거리며 파티션 안쪽으로 들어간다. 다들 살았다며 한숨 쉬는 찰나에 불쑥 편집장의 목소리가 주방 너머에서 들린다.

오늘 늦게 온 막내는 따라 들어와 보조하도록.

파티션 안쪽으로 들어가자 편집장은 벌써 요리용 라텍스를 끼고 앞치마를 두른 채로 브로콜리를 섬세하게 씻고 있었다.

비건이라고 했나?

네.

고기는 아예 안 먹어?

다른 분들과 있을 때는 가능하면 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다른 팀원이 저 하나 때문에 모두 비건 음식만 드셔야 하는 게 마음이 좀 그래서요.

그게 뭐 어때서. 하루에 한끼 정도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그 한끼가 정말 중요한 날이 있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네. 브로콜리 썰어서 줄기랑 끝부분이랑 따로 분리해놔. 감자도 손질 좀 해주고.

편집장은 잘 씻은 브로콜리와 감자를 내 앞에 두고 팬에 올리브오일을 넣고 마늘과 양파를 넣고 중불로 볶는다.

원래 버터를 넣어야 더 맛있는데 너 때문에 올리브오일로 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뭐 만드는지 알겠어?

잘 모르겠는데요.

브로콜리 수프야. 서로 신경도 많이 쓰고 할 일도 많은 날에는 뭘 먹어도 거북한 법이거든.

팬에 감자를 넣고 더 볶다가 물을 붓고 브로콜리 줄기까지 함께 끓이기 시작한다. 벌써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편집장은 내게 믹서를 건네며 씻어두라고 지시한다. 그러고는 젓가락으로 팬 안의 감자를 몇번 찔러보더니 브로콜리 끝부분도 넣는다.

요리랑 잡지는 비슷한 게 많아. 대부분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해 만들어지지. 결과물만 보면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생각보다 제대로 만들기는 어려워. 재료 하나가 전체를 망칠 수도 있고, 기사 하나로 잡지가 완성되기도 하거든. 몇번이고 정확하게 계량해서 만들어도 맛이 달라질 때가 많아. 잡지도 마찬가지지.

끓인 재료들을 3분 정도 식힌 후에 믹서로 갈아두라고 말하고는 팬을 하나 더 꺼낸다. 그리고 베이컨 한팩을 꺼내 버터를 넣고 바싹 구운 후에 한쪽 그릇에 담아둔다. 팀원들이랑 있을 때는 고기를 먹으라는 뜻인가…. 나는 그저 가만히 편집장이 시킨 대로 재료들을 믹서에 넣고 차례로 갈아둔다. 편집장은 갈아둔 재료를 두개의 팬에 차례로 부었다. 한쪽 팬에는 우유와 생크림 그리고 치즈 가루를 넣고, 다른 한쪽에는 오트 밀크를 넣고 더 끓인다.

그릇이랑 수저 들고 나가서 같이 세팅하고 다시 들어와.

원탁에 각자의 그릇과 수저가 세팅되고 다시 파티션 안쪽으로 들어가자 편집장은 수프 볼 하나를 내게 건네고 자신도 하나 들고는 밖으로 나간다.

막내가 들고 있는 게 비건식이니까 비건식으로 먹고 싶은 사람들은 저것을 먹도록.

몇몇은 비건을 위한 브로콜리 수프를, 절반은 베이컨까지 들어 있는 수프를 먹었다. 들어간 재료 하나 두개로 맛도 풍미도 달라졌지만 따뜻한 마음이 채워지는 것은 동일했다.

비건식으로는 처음 만들어봤는데 괜찮나?

편집장의 물음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국 기획 회의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오래 만들어도 기획 회의는 매번 피를 말리고, 아이디어는 작아지고, 아이템은 고갈된다. 매번 처음 하는 마음으로 잡지 앞에 서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잡지를 완성할 방법이나 요령이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매호 모두가 전력투구할 뿐이다. 맛있는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