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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가 주는 매혹은 어디에서 오는가, 현재라는 유적지를 배회하는 사람들
유선아 2024-02-23

스크린 속으로 겨울 풍경과 상점이 늘어선 거리가 펼쳐지고, 스크린 위로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필름에 새겨진 스크래치 자국이 상하로 흐른다. 영사되는 화면에서 마주한 필름 노이즈의 물결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만이 볼 수 있는 장치다. 영화관에 걸린 흰 영사막을 경계로 두고 그 안과 밖을 구분지어본다. 그렇게 나눈 영화 속 세계와 영화관 객석에 각기 다른 현재의 시간이 있다. 혼선을 줄이기 위해 영화 속 시간은 ‘과거-현재’로, 객석의 시간은 ‘지금-현재’로 적는다. 1970년 겨울, 학교에 홀로 남은 유일한 학생인 앵거스 털리(도미닉 세사)가 고대문명을 가르치는 역사 선생 폴 허넘(폴 지어마티)과 함께 밤거리를 걸을 때, 이 장면 안에 두 사람이 길 위를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의미해진다. 다른 모든 영화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영사되는 시간 동안에 지속되는 영원한 현재이므로 <바튼 아카데미>안의 시간과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 마주치고 있다. 그뿐인가. 이 영화에서 시간의 지층 저 아래에는 폴이 가르치는 고대문명이 지배하던 시간이 존재를 드러내며 깊숙이 자리하고, 그것은 다시 영화 속의 과거-현재인 1970년과 영화를 보는 이의 지금-현재를 관통하여 하나의 시간으로 꿰어진다.

시간의 겹

<바튼 아카데미>는 시간과 그를 드러내려는 이미지의 결, 그리고 가장 외피에서 저 둘을 감싸안는 영사막을 지나 영화를 목격하는 지금-현재에 도달하는 여러 시간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려 애쓰는 중이다. 영화의 타임프레임은 1970년의 크리스마스 휴일을 앞둔 어느 날에서 시작해 1971년의 새해를 맞은 그 이후의 며칠을 담는다. 언급한 대로 <바튼 아카데미>는 시작에서부터 거친 노이즈를 드러내며 가상 필름의 질감과 사운드를 스크린에 구현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영화다. 후반작업에서 더해진 긁히고 탈색된 빛의 영화 이미지가 구현하고 있는 필름의 물질성을 강하게 의식하더라도 1970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조금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바튼 아카데미의 주방장인 메리(데이바인 조이 랜돌프)의 아들은 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다. 방학을 앞두고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죽은 동창생을 기리며 추모 기도를 올리지만 영화에서 베트남전에 대한 언급은 스치듯 지나가버린다. <바튼 아카데미>의 바깥에 있는 지금-현재와 두텁게 사이를 벌린 1970년은 당시의 역사나 시대정신을 소환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닌 듯하다. 바꿔 말하면 이 영화의 시간이 약 50년 전에 머물렀어야 하는 까닭에는 시간의 겹을 한층 더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에서 영화가 영원한 현재를 약속하는 것처럼 <바튼 아카데미>가 약속하는 것은 시간의 지층이다. 겹과 층으로 쌓인 영화의 시간은 숏의 연결과 편집 기술의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오프닝크레딧이 폴의 집무실로 이동하기 전, 카메라는 정돈을 하다가 멈춘 듯한 침실과 물기 없는 욕실을 비춘다. 이 방의 주인은 전사한 메리의 아들 커티스다. 지금 부재한 것으로 시간을 드러내는 숏 이미지는 영화가 지금 존재하는 것을 비추는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또 다른 시간의 층을 만들어낸다. 한밤중에 몰래 교내를 돌아다니는 앵거스와 디졸브되는 전사한 커티스의 사진은 <바튼 아카데미>가 시간의 결을 드러내기 위해 구체화한 이미지의 또 다른 방식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비록 천의무봉의 손길로 짜인 구성은 아닐지라도 시간의 겹과 이미지의 막은 거친 노이즈 화면을 띄운 영사막을 가장 바깥에 두고 부재한 과거-현재와 존재하는 과거-현재를 얇게 겹쳐놓는다. 영화의 과거-현재가 흘러감에 따라 시간의 장막은 걷어 올려진다. 겹겹의 시간이 감싸안고 있는 것은 크리스마스 휴일을 앞두고 가족, 친구와 떨어져 바튼 아카데미에 남겨진 자들(The Holdovers)과 그들이 품은 역사다.

평행하는 시간 사이에서

앵거스가 홀로 심야에 교내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닐 때, 그의 모습은 이미 여러 겹으로 포개어진 시간과 이미지 아래에서 길을 잃고 떠도는 사람처럼 쓸쓸하다. 희붐한 어둠이 자아내는 빛바랜 듯한 과거-현재의 이미지 탓일까. 앵거스와 폴은 그러한 밤거리를 두번 걷는다. 한번은 학교 인근의 펍을 나선 다음이고 다른 한번은 폴의 대학 동창과 우연히 마주친 뒤다. 이들은 카메라와 평행한 건너편에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스크린의 왼쪽과 오른쪽을 향해 걷는다. 카메라는 두번 모두 그 움직임을 따라 좌우로 트래킹한다. 인상 깊은 것은 두 번째로 보스턴의 상점가를 걷는 장면이다. 지금껏 <바튼 아카데미>의 시간은 그 층위와 그를 표현하려는 이미지로 인해 겹과 막을 이룬다고 적었다. 들춰낼 수도, 다시 덮을 수도 있는 겹과 층은 깊이를 암시한다. 앵거스와 폴은 보스턴의 밤거리를 저 안쪽에서부터 스크린을 향하여 걸어온 후, 카메라와 평행을 이루는 거리에 도달하여 프레임 안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심도를 느낄 수 있는 먼 거리에서 이쪽을 향해 다가왔으나 결국에는 좁혀지지 않는 카메라와의 거리감은 이 장면에서 주요하다. 그래서 1970년 보스턴의 밤거리를 걷는 장면은 또다시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을 품고 있다. 앵거스와 폴이 지금-현재와 틈을 벌리고 영화 속 과거-현재에 진공포장된 채로 영원히 남겨질 것만 같아서다. 영화는 영원한 현재의 예술이라는 말이 이 장면에 이르러 다른 뜻으로 읽히고 만다. 그것이 영화의 마술적 순간의 경이를 의미함은 아닐 것이다. 영화 속 과거-현재와 우리의 지금-현재가 영원히 평행하여 결코 만날 수 없음을 영화 속 과거-현재에서 예언하는 일에 가까워서다. 그럼에도 앵거스와 폴과 메리를 과거-현재에 남겨진 자들이라 다시 부르는 일은 망설이게 된다. 영화의 안과 밖에 있는 시간의 틈이 다시 그만큼을 뛰어넘어 우리의 지금-현재로 다가올 그들의 미래를 상상해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플래시백 없는 영화의 시간을 따르다 보면 붓으로 먼지를 털어 유물을 발굴하듯 우리는 앵거스와 폴, 메리의 과거, 그들의 역사로 다가서게 된다. 그 역사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고전이 아니다. 폴의 말을 조금 바꿔 옮기자면 인류는 희로애락 중 그 어느 것도 발명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잠시 역사가가 되어 이들을 분류해야 한다면 길을 잃고 헤매다 남겨진 자들이 아닌, 현재라는 이름의 유적지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알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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