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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집단기억의 무덤 깨기
정준희 2024-03-21

영화판에서 때아닌 이념 전쟁이 한창이다. 진작부터 “좌파에 장악된” 영화계를 교정하기 위해 싸움을 걸어온 이들이 있고 영화 이름에서부터 ‘전쟁’을 집어넣었다. 대통령 등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거들기도 한다. 잘 몰랐던,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그 영화를 통해 배웠다는데, 영화가 다루었다는 사실이 역사학계가 이미 집적해놓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거나 이미 특정 집단 사이에 돌고 돌던 ‘의견’에 불과한 터라 헛웃음이 난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헌법적 책무’를 짊어진 그는 영화 이전에 알고 있었어야 할 ‘기초적인’ 역사를 대체 무엇으로 배우고 있었단 말일까?

애써 붙인 이념 다툼이 그럭저럭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인지 최근 개봉한 ‘일제 쇠말뚝’ 영화를 두고 “좌파들이 보는 영화”라고 딱지를 붙인 감독. 그러나 꽤 비싸진 영화표를 사서 굳이 시간을 들여 영화관에 갈 여유가 있는 좌파가 우리나라에 너무 많아서인지, 이 영화는 또 한번의 ‘천만 관객 흥행사’를 써나갈 기세다. 몸소 영화를 관람까지 해가며 기묘한 ‘바이럴 홍보’의 주체가 된 그 감독. 알고 보니 좌파 영화든 우파 영화든 사람들이 많이 봐줘서 우리 영화산업이 흥성하길 바라는 진정한 영화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실은 천사이지만 굳이 악역을 자처하는 캐릭터.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영화일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그 깊은 의중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영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극도로 산업화된 대중예술이다. 애초에 이념이란 걸 철저히 배제한 영화라는 게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이념을 산업화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하다는 뜻이다. 국가가 선전선동 영화(만)를 만들어 보게 했을 때도 이념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저 당대의 영화기술이 신기하거나, 놀거리가 그것밖에 딱히 없었거나, 억지로 보라고 하니 보았을 따름이다. 강요할 수도 없고, 선택지도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로지 선전선동을 목적으로 이념을 담는 영화가 산업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성공이란 걸 한다면, 그건 ‘비산업적’ 논리가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너무나 산업스러운 산업이 된 것, 우리의 미적 감성과 정서가 시장에 의해서만 조율된다는 것은 그리 탐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과 시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만은 긍정적으로 동의한다. 노동대중의 건전한 정신을 마비시키는 소비자본주의의 음모와 마력에 질색하고 한탄했던 어느 학파도 있었지만, 도무지 재미나 의미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영화를 몇몇 세력이 부추긴다고 하여 파격적 성공을 거두며 대중의 두뇌를 잠식해가는 경우란 그리 흔하지 않다.

파묘는 원래 이장을 목적으로 하거나 부관참시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의 무덤을 깨서 (심지어 당대의 그가 내걸지도 않았던) 이념의 좀비로 만들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의 역사적 무의식 안에 숨어 있던 쇠말뚝을 빼내고 아직도 그곳에 들러붙어 있는 망령을 내쫓기 위해 무덤을 부순다. 산소호흡기를 붙인 채 여린 맥박만 뛰고 있는 우리의 영화산업은 어떤 파묘를 그나마 지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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