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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전락하는 자의 꿈, <키메라>
소은성 2024-04-24

에트루리아의 무덤에서 훔친 여신상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고 있던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의 배에서 아르투(조시 오코너)는 여신상의 해체된 머리 부분을 갑작스럽게 바다로 던져버린다. “살아 있는 자들이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탈리아(카롤 두아르트)의 말을 실현시키듯 두상은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로부터 멀어지면서 바다로 잠긴다. 밑바닥에 닿은 두상이 흙먼지를 일으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거기에 몽타주되는 것은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것은 또한 에우리디케의 얼굴이었을까. 하데스로부터 에우리디케를 돌려받기 위한 여행이 끝나갈 무렵 오르페우스는 주어진 규칙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다. 로마의 시인들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또는 그를 둘러싼 죽음에 압도되어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시인 체사레 파베세는 이 신화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파베세의 오르페우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이르러 그가 수행한 여정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에우리디케가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야 할 것”을, 뱀에게 발목을 물려 죽음에 이르렀듯 “과거에 있었던 것은 앞으로도 있을 것”을 생각한다. 오르페우스는 뒤따라오던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았고, 그의 입을 빌려 파베세는 말했다. “이제 에우리디케는 없어요. 그런 것에 이름이 있는데, 인간이라고 부르지요.” (체사레 파베세, <레우코와의 대화> 중)

달리는 기차 속의 아르투

로르바케르의 오르페우스는 시인이 아니다. 다만 고고학을 사랑했으나 전락하여 도굴꾼이 되어버린 아르투는 보이지 않는 지하의 무덤, 죽은 자들에게 속하는 세계를 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르페우스만큼이나 신적인 인간이다. 땅속에 묻힌 유물을 감지할 때 빠져드는 ‘키메라’의 상태를 통해 아르투는 죽은 자들의 세계와 교통한다. 그 순간을 형상화하는 상하가 반전된 이미지는 그에게 속한 전락의 모티프를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투는 로르바케르의 전작인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위아래가 뒤집힌 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음으로부터 산 자들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위상의 차이가 있을 뿐 그는 아르투와 확연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불가역적인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기적은 끝내 무화되고 만다.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산 자들의 세계,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듯 자본주의체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신성이 불러온 기적조차 선한 사람의 삶의 지속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기적 때문에 오히려 라짜로는 이 세계의 철저한 이방인이 된다.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삶은 돌아갈 집이 사라져버린 망명자의 삶일 뿐이다.

<키메라>의 첫 번째 시퀀스는 아르투 역시 이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임을 보여준다. 달리는 기차는 언제나 도중에 있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여행자들에게는 얼마간 이방인의 속성이 부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는 서사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제들마저도 모두 침묵에 부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아르투가 낯선 외양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사실뿐, 그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가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향해 가는지, 왜 그 기차를 타야 했는지, 그가 소지한 이상한 탑승권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기차의 객실과는 다른 이질적인 공간이 부각된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 제시되는, 아직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베니아미나의 얼굴 클로즈업숏이 그것이다. 관습적인 몽타주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 그 숏은 객실에서 잠들어 있는 아르투의 꿈인 것이 분명하다. 꿈은 티켓을 확인하려는 검표원에 의해 중단된다. 그는 아르투에게 무례한 농담을 던진다. 이제 당신은 그 꿈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듯 꿈이 중단된 기차의 객실은 어떤 얼굴에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친밀함의 제스처가 제외된 세계다. 단 한 가지, 그 낯선 세계에서 아르투에게 이루어지는 유일한 접촉이 있다면 그것은 꿈에서 베니아미나가 말한 햇빛, 차창 너머로 잠든 그를 따라오며 비추고 있는 햇빛이다.

다시 어둠 속으로

예상할 수 있듯 아르투가 몸을 실은 기차는 어딘가에 도착하지만 정작 그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물론 그에게는 지붕 아래 몸을 누이고 잠들 수 있는, 그래서 베니아미나의 꿈을 꿀 수 있는 곳이 있지만 이탈리아는 그것을 은신처라고 부른다. 플로라(이사벨라 로셀리니)의 집은 아르투가 아닌 베니아미나의 가족들의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도굴꾼 집단인 톰바롤리는 유쾌해 보이는 외양 안에 각자의 이득만을 노리는 비열함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사업가 스파르타코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기를 기대하며 아르투의 도움을 받아 아무도 손대지 않은 무덤들을 찾아내 파헤칠 수 있기만을 바란다. 그의 ‘키메라’의 상태는 죽은 자들의 세계와 교감할 수 있는 통로이지만, 동시에 그 세계로부터 아르투 자신을 추방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가 찾아낸 에트루리아의 무덤을 열자 벽화는 빛이 바래고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던 여신상은 상품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돌로 깨어져 해체된다. 아르투는 결국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 모두에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두 세계 모두에 속한다는 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해체된 두상을 다시 어둠 속으로 돌려놓은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에우리디케를 향해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선택과도 같은 아르투의 결단일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이 불가능함을 <행복한 라짜로>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키메라>는 그러한 세계에서 지하에서의 삶 역시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파르타코와 같은 문명의 대표자에게 지하에 잠들어 있는 죽은 자들의 세계는 지상의 여느 것들과 마찬가지로 잠재적인 상품에 불과하다. 어쩌면 가장 안전한 곳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버려진 기차역에 마련한 이탈리아의 공동체마저 떠나고야 마는 아르투에게서도 그러한 포기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포기의 결정적 증거는 영화의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르투는 다시 한번 지하의 무덤으로 내려간다. 입구가 무너져내리고 완전한 어둠에 갇히고 났을 때 그는 베니아미나의 옷에서 풀려나온 빨간색 실을 발견한다. 아르투는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라짜로가 지상의 삶을 거부하고 죽음으로 보이는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면, 지상에서의 삶을 포기한 아르투는 완전한 전락을 선택하고 지하의 무덤 안에 갇힌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는 친밀함의 세계로서 베니아미나는 전락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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