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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 컬트 <스트레이트 스토리>
2002-06-27

뿌리 깊은 집

“머리에 먹물이 든 놈은 겁이 많습니다.”

이 말은 영화 <게임의 법칙>에 나왔던 대사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이렇게 글을 써서 보내면 원고료도 보내주니 그렇게 분류되기 싫어도 ‘먹물’에 가까운 부류인 것 같다. 그래서 저 대사를 들었을 때 뜨끔해서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겁이 많다. 폭력에 대한 겁도 그러하거니와, 고상하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동요되거나 심리적으로 흔들리거나 가치관의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겁을 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먹물’들은 영화를 봐도 쉽게 감동에 빠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관객이 슬픈 영화를 보고 손수건으로 눈물바다를 훔치고 있을 때도 ‘먹물’들은 ‘그 영화가 왜 슬플 수밖에 없는지’ 냉철하게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해서 이성과 지성의 책상 서랍 속에 콱 처박은 다음 꼭꼭 잠가버린다. 신파극처럼 유치하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볼 때도 그랬다. 사실은 뭔가 가슴속에서부터 울컥 하는 느낌들이 자주 있었지만, 마치 배멀미를 참기 위해서 먼곳을 바라보며 태연한 척 안간힘을 쓰듯이 나는 “데이비드 린치는 역시 대단해, 저렇게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도 완벽하잖아”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하지만 결국은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팔뚝으로 터진 둑을 막고 버티던 네덜란드 소년처럼 버티다가 영화 끝나기 1초를 남겨놓고 결국 불가항력으로 눈물이 터져버렸다. 아… 젠장,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될걸… 유치하게 왜 말려든 거야?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미국의 아이오와 깡촌에서 살고 있는 73살의 앨빈 스트레이트라는 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 늙어 노쇠한 그에게 의사는 보행기를 권장하지만 그런 현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형제로서의 연을 끊고 지내던 형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노인은 죽기 전에 그 여한을 풀고 싶어서인지 형을 만나려고 그 먼 땅을 찾아 떠난다. 비행기를 탈 돈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는 노인이 자력으로 가겠다고 선택한 수단은 자신이 운전할 수 있는 유일한 탈것- 바로 잔디깎이 기계였다. 그것을 타고 시속 5마일로 한달 보름이 걸려서 기어이 형을 만나고야 만다. 뭐하려고….

나는 나의 가족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몇년을 알고 지내던 사람도 내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할 지경이다. 자랑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부끄러운 것도 전혀 아니다. 사실은 남들에게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족을 생각하면 냉철한 ‘먹물’의 이성으로도 절대로 초월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가족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나의 누나들에게, 내 남동생에게,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한번도 말해 보지 못했고 미안하다고도 말해 본 적이 없고 보고 싶다고 말해 본 적도 없다. 말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 당연한 말조차도 못했다. 그래서 가족을 떠올리면 슬픈 영화를 볼 때처럼 힘겹다. 가족이란 거부할 수 없는 신파극이다. 말하지 못한 설움이 있음으로 해서 그 특유의 감정에 빠지는 게 두렵다. 역시 겁이 많은 편이다.

그러는 나는 언제가 될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말하지 못한다’라고 느낄 순간이 언제가 될까. 나는 지금 빠른 자동차도 있고, 휴대폰도 있지만 가슴속에 파묻어둔 이야기들을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애써 외면하고 있는데, 세상에 저 노인네는 수백킬로미터를 잔디깎이를 타고서라도 기어기어가더란 말이다. 젠장….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