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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가 건네받은 것 - 숏과 리버스숏이라는 문제

다섯 번째 키워드 - 전승된 몸짓들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다섯 번째 키워드는 ‘전승된 몸짓들’이다.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 ‘생태 변이’에 이어 21세기 영화가 20세기로부터 전승하거나 변주하거나, 혹은 새로이 만든 영화 속의 움직임들이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첫 번째 연재는 김병규 영화평론가의 차례다. 21세기 영화에서,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물려주는 이미지와 숏들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두 세기의 사이를 메꾸려 한다. 그 순간의 몸짓들을 포착한 글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장뤼크 고다르가 우리에게 증여한 영화의 유산이란 무엇인가. 이어서 ‘전승된 몸짓들’은 어딘가에서 깨어나 영화적 이행을 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촬영하는 동작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하려 한다. 더하여 20세기풍의 시선 교환이 어떻게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논한다. 영화 속 움직임으로부터 감지된 이 몇 가지 신호들은 21세기의 영화를 어떻게 독해해야 할지에 의미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영화가 건네받은 것

숏과 리버스숏이라는 문제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에서 온천으로 여행을 떠난 네 친구는 강 위의 다리를 건너다 문득 반대편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엔 네 친구 가운데 한 명인 후미의 남편이자 책 편집자 타쿠야와 그가 담당하는 젊은 여성 작가 노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네 친구가 두 사람을 향해 인사하면, 카메라는 빠른 속도의 수평 패닝으로 움직여 반대편에 있는 타쿠야와 노에를 보여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인사를 듣지 못한 듯 대답 없이 걸어간다. 네 친구가 다시 손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자, 그제야 건너편에서 들려온 인사에 응답하는 두 사람이 리버스 숏으로 보인다. 패닝 숏에서 들리지 않던 인사는, 숏과 리버스 숏으로 쪼개진 뒤에 뒤늦게 들려온다. 하마구치는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다른 결과를 한 차례의 패닝과 한 차례의 숏과 리버스 숏의 결합으로 연출한다. 손짓을 매개로 하나의 이미지는 두 가지 경우의 수로 열린 교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장면은 그들이 함께 떠난 여행을 분기점으로 네 친구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하고 타쿠야와 노세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미묘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영화 속 복잡한 관계로 뒤얽힌 여섯 명의 주요 인물이 한 장면에 모이는 것은 이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동행한 여행과 우연한 마주침, 친구들의 평온한 산책과 불륜을 나누던 연인의 걸음, 예외적인 고속 패닝과 범용한 숏과 리버스 숏이 겹친 장소에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하마구치는 인물들을 감싸는 우정과 사랑의 시간이 무너지기 직전에 작은 손짓을 매개로 그들을 하나의 숏에 모아둔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공간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걸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걸까? 인물들은 과감한 속도의 패닝 위에서 한 장면에 속하고, 장면이 바뀌면 숏과 리버스 숏으로 분리된다. 장면과 장면 사이엔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솟아오른다. 카메라의 갑작스러운 패닝으로는 들리지 않던 인사가, 왜 숏과 리버스 숏으로 분할되고 나면 전달되는 걸까? 외침과 무응답으로 채워진 패닝, 다시 주어지는 부름의 숏과 응답의 리버스 숏. 세 장면은 표면적으로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차례로 배열된 세 장면은 화면에 펼쳐진 상황과 무관한 시각적 논리의 계열을 부여한다. 하나의 숏 안에서 손짓은 연결되지 않는다. 영화가 장면을 나누고 나서야 화면 위의 인물들은 상대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질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차이가 장면을 절단하고 영화를 분해하는 유일한 원칙이 된다. 영화의 표면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건네받는 것과 건네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 차이가 허구적 공간을 창출하는 영화의 원리를 만들어낸다. 숏과 리버스 숏은 세계 내부의 작은 차이를 감지하며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형식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에서 두 남자는 포로를 교환하는 다리 위에 선다. 소련의 스파이인 에이블은 협상을 나누던 미국의 변호사 도노반을 뒤로 하고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넘어간다. 숏은 여기와 저기, 나의 시선과 그들의 반응으로 나뉜다. 차에 타기 직전에 에이블은 도노반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은 두 사람의 우정을 증언하는 희박한 친밀함의 근거지만, 두 숏은 다리 위의 건널 수 없는 경계에 가로막혀 교환되지 않는다. 교환되지 않는 시선이라는 문제는 서사의 질서와는 무관하게 <스파이 브릿지>에 담긴 숏의 계열에 강력한 긴장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는 열차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는 도노반의 시선이 두 차례 나온다. 첫 번째는 베를린 장벽을 지나가다 총살당하는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협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도노반이 철창을 넘는 빈민가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시선이다. 사건이 종료된 뒤에도 숏의 구조는 견고하게 유지된다. 너무나 빨리 스쳐 지나가는 사건의 숏과 응답할 수 없는 리버스 숏은 국가의 지리적인 경계와 파국과 일상이라는 상황의 구분을 넘어 숏의 잔상에 남는다. 역사 앞에서 두 장면은 접속에 실패하고 교환은 불가능하다.

역사의 상흔은 영화의 겉면에 돌아온 것과 되돌아오지 못한 것을 나눈다. 하지만 숏과 리버스 숏의 체계는 표면적인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대신 영화 이미지에 새겨진 모순을 되짚으며 세계의 모호한 진실을 간직한다.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피닉스>의 첫 장면에서 강제수용소 생존자를 태운 자동차는 국경지대의 다리를 건너 돌아온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잔혹한 킬러의 정체성을 깨워낸 남자는 미국의 대지를 가로질러 집에 돌아온다. 닫힌 장소를 넘어 돌아온 자들의 육체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이 겹쳐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훼손된 얼굴과 수술로 복구된 얼굴, 가정을 지키는 평범한 가부장의 얼굴과 수십 명을 끔찍하게 살해한 킬러의 얼굴이 한 장면에 담긴다. 지워진 역사의 단면이 불투명한 얼굴의 숏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그들의 신체는 또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일관된 정체성을 증언한다. 여자의 손목에는 강제수용소의 수감번호가 적혀 있다. 남자의 손은 여러 명을 살해한 피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 영화들은 되돌아온 자들의 불투명한 얼굴과 증거를 간직한 육체를 한쪽에 비춘다. 그들을 바라보고 얼굴을 인지하고 육체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표정과 선택을 반대편에 비춘다. 숏과 리버스 숏의 절단면에 역사와 국가와 인간의 모순을 관통하는 영화의 특수한 좌표가 솟아오른다.

<그랜 토리노>

새로운 세기에 불시착한 영화는 과거의 낡은 가치를 내면에 품은 시대착오적 존재를 남겨둔다. 시대의 균질한 질서와 불화하는 존재만이 세계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숏과 리버스 숏이라는 형식에 속할 수 있다. 두 시대가 느슨하지만 거부할 수 없이 결합해 있는 영화사에서 유일하게 남은 시대착오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의 영화는 낡은 규칙을 고수하는 인물과 그 규칙이 실행 불가능해진 현대적 세계가 부딪히는 대립의 무대에 있다. <그랜 토리노>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월터 코왈스키는 변모하는 세계를 관찰하는 숏의 자리에 존재한다. 그의 시선이 닿는 리버스 숏에 달라진 세계의 모습이 차례로 주어진다. 두 세기를 통과한 역사와 영화는 이스트우드가 주시하는 대립의 무대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한다. 그의 영화는 웨스턴과 전쟁의 기억을 안고 서부 총잡이의 규칙이 희박해진 세계에 거주한다. 이스트우드의 주변을 감싸던 웨스턴의 풍경과 형상은 지워지고 없다. 세계에 희미하게 남은 시대착오적인 시선이 영화의 숏과 리버스 숏을 일으키는 차이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가까스로 유지되던 세계는 그러나 지극히 위태롭게 변형 중인 장소이기도 하다. 내부의 차이는 점점 더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저격수 카일은 그와 같은 처지의 퇴역군인에게 총살당한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 겨눠지던 총은 거꾸로 뒤집혀 되돌아온다. 그는 전쟁의 영웅으로 살아남았고 여전히 주어진 소명을 내면에 품고 있지만, 그것은 이제 카일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근거가 아니라 그의 신경증적인 불안의 원인이 된다. 좌표를 식별할 수 없는 모래바람으로 가득한 영화의 지각 체계 안에서 카일이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의 공기와 죽음과 끔찍한 기억으로 가득한 전쟁의 대기는 다르지 않다. 이스트우드의 숏은 대기에 깃드는 거역할 수 없는 멜랑콜리의 운명 앞에 노출되어 있다. <체인질링>에서 뒤바뀐 아이를 되찾기 위해 항의하는 한 인간의 언어는 정신병자의 말로 취급되다가 법정의 진실로 교환되어버린다. <리차드 쥬얼>에서 범죄자와 무고한 시민의 얼굴은 똑같이 너무나 투명하고도 비가시적이어서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우아하고 유려한 진실의 세계와 우스꽝스럽고 저열한 거짓의 세계는 같은 시각적 질서 아래 존재한다.

내부의 차이가 소진되고 모든 것이 비대칭적인 거울의 무대가 되어가는 세계.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영화의 원점을 파고드는 것처럼 강박적으로 이 문제의식을 숏에 새긴다. 앤더슨은 한 세대 전의 전쟁과 아버지의 시대에 접근하는 기획인 <마스터>에서 1950년대라는 시기로 돌아가 시대착오적인 두 남자의 관계를 다룬다. 두 남자 프레디와 랭커스터는 수많은 규정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관계를 이룬다. 교주와 신도, 아버지와 아들, 사육사와 짐승, 소유자와 피소유자. 어떤 말로도 모자라거나 과도한 관계로 뒤엉키는 두 사람은 화학물질로 제조된 정체불명의 밀주를 함께 마신다. 타인의 피를 흡수해 삶을 유지하는 뱀파이어처럼 그들의 몸 안에는 같은 성분이 흐른다. 그들이 들이킨 밀주의 재료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몸 안에 밀주를 들이킨 순간, 그들은 같은 성질의 인간으로 서로의 눈앞에 선다. 인간과 대지, 자본주의와 종교가 서로를 침식하고 흡수하던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로 앤더슨의 영화에서 인간은 통제 불능의 충동으로 작동하는, 그러나 전부 같은 원료를 주입해 움직이는 기계장치가 된다. 인간은 지워지지 않는 고통과 충동적인 욕망으로 뒤섞인 불안정한 기계다. <팬텀 스레드>에서 두 연인은 서로를 사랑하고 연민하고 경멸하면서 결국은 재회한다. 그 시간은 자기의 자아를 보호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흘러간다.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독을 먹이는 두 사람은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맞물린 기계다. 그들의 관계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미장센에 무수히 채워진 거울 관계에 속한다. 앤더슨의 인간은 비대칭의 형태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똑같은 독성물질을 삼킨다.

세계의 모든 질료가 균질적으로 변해버린 환경에서 숏과 리버스 숏의 교환을 만들기 위해 영화는 어둠 속에서 예외의 빛을 포착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불 꺼진 복싱장에서, <그랜 토리노>의 지하 창고에서 이스트우드는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가 전구의 빛이 가닿는 곳으로 걸어 나온다. 작은 광원만이 남겨진 실내 공간의 어둠 속에 살아가던 그는 무심한 교환을 위해 세계로 되돌아온다. 성냥불과 램프의 빛이 켜졌다가 꺼지는 잠깐의 찰나에 영화적 교환의 장소가 탄생한다. 그 안에 추상적이고 내밀한 경계가 설정된다. 교환의 무대를 잃어버린 영화는 빛과 어둠의 틈새에서 일시적인 만남의 장소를 건축한다. 두 편의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내밀한 어둠 속으로 찾아온 다음 세대의 후계자들에게 지난 시대의 가치를 건넨다. 복싱의 기술, 오래된 자동차,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건넨다. 더 이상 세계를 변화할 수 없고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과 행위를 바꿀 수 없을 때, 이스트우드는 한 인간이 퇴장하고 그의 믿음이 타인에게 전해지는 증여의 순간을 바라본다. 공동체의 시작을 가리키던 장르인 웨스턴은 그의 손짓 아래서 희박한 세계의 끝을 마주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새로운 시작을 희망하는 장르가 된다. 두 영화의 마지막에 이스트우드의 육체를 둘러싸고 주어지는 유언과 증여는 조금 더 진전된 미래를 향해 던져진다. 다만 이것은 책임을 동반한다. 유산을 건네받은 자는 죽은 자의 유언 앞에서 실현되지 않은 희망과 시대착오적인 약속을 내면에 안는다. 이스트우드의 숏에선 이 희망과 약속을 위해 하찮은 것과 귀중한 것을 교환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그의 손짓에서 진실과 거짓이 뒤엉키는 문제적 사태는 단호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아워 뮤직>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더불어 21세기 영화의 장소에 과거의 규칙을 밀반입하고 시대착오적인 불화를 퍼트리던 드문 실천가는 장 뤽 고다르일 것이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작가는 숏과 리버스 숏의 문제를 영화의 유일한 장소이자 과업으로 다루던 마지막 영화감독들이다. 하지만 고다르에게 있어 세계가 원하는 것을 건네주는 증여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훔치는 영화의 도굴꾼이지만 남들이 원하는 것을 건네주지 않는 이미지의 배반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무단으로 가져오지만 누군가 원하는 것을 건네주지 않는다. 고다르는 터무니없는 교환의 작가다. 하지만 그의 변덕스러운 교환으로부터 영화는 뜻밖의 아름다움을 돌려받는다. <아워 뮤직>에서 고다르는 1차 세계대전의 발원지인 사라예보에 방문해 이미지에 관한 강연을 진행한다. 그는 하워드 혹스의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1940)에서 발췌한 고전적 규칙의 숏과 리버스 숏을 두 손에 든다. 고다르의 관점을 빌리면, 혹스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를 포착한 두 단독 장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영화는 그 투명하고 평등한 규칙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또 다른 숏과 리버스 숏이 있다. 1948년에 유대인은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고다르는 두 장의 사진을 손에 들고 번갈아 비추며 비대칭적 숏과 리버스 숏을 만든다. 이 비대칭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아워 뮤직>은 고다르의 뒷모습과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는 유대인 학생 올가의 모습을 숏과 리버스 숏으로 담아낸다. 세 종류의 숏과 리버스 숏은 모두 가능한 숏의 교환으로 영화 안에 존재한다. <아워 뮤직>에서 팔레스타인의 숏은 고전기 할리우드의 장면과, 생존한 유대인들과, 죽은 인디언들과 결합할 수 있다. 고다르의 영화는 숏의 원칙을 정확히 식별하고 마주하기 위해 영화와 역사와 시선 사이를 끝없이 가로지른다. 이미지를 붙잡은 고다르의 손이 그 중간에 있다. 강연이 끝난 뒤에 올가는 고다르에게 자신이 만든 영화의 DVD를 건넨다. 그녀는 영화를 만드는 대신 극장에서 자살하지만, 고다르가 상상한 ‘천국’에 도착한다. 영화의 원리를 통해 어둠 속의 밀실에 갇힌 숏은 다른 모든 곳에서 만들어지는 가능한 숏과 이질적으로 교통할 수 있다. ‘우리의 밤과 우리의 음악을 빛으로 밝히는 것’, 그 자리에서 숏과 리버스 숏의 장소가 탄생한다. 이것이 무엇도 건네주지 않는 고다르의 영화로부터 우리가 두 손에 건네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