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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레퀴엠
2002-07-09

■ Story

중년의 과부 사라(엘렌 버스틴)는 초콜릿을 먹으며 TV다이어트쇼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는 사라의 보물인 TV를 팔아 마약을 조달하고, 사라는 해리가 팔아넘긴 TV를 되사는 일상이 반복된다.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단짝 친구 타이론(말론 웨이언즈)도 마약에 중독돼 있다. 해리는 타이론과 함께 마약 중개상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마리온을 후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약 거래선을 놓쳐버리자 절박해진 해리는 마리온에게 매춘을 강요한다. 한편 TV쇼에 출연해달라는 장난전화를 받은 사라는 무리하게 살을 빼다가 다이어트 약물에 빠져든다. 그들의 중독된 삶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 Review

막이 오르면, 엄마 사라와 아들 해리의 악다구니가 들린다. 사라가 TV에 체인을 감아 잠궈놓았고, 해리는 그런 엄마를 나무라고 있다. 그런데 한 공간에 있는 이들이 둘로 분할된 화면 속에서 따로 놀고 있다. 평행선 같기도 하고, 거울 같기도 하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하는 채로 맞물려 닮아가는 운명이란 뜻일까? <레퀴엠>은 그 불길한 첫인상을 배반하지 않는다. “이건 현실이 아냐. 현실이라면 나아질 거야.” 사라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런 희망은 부질없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로 이어지는 <레퀴엠>엔 결코 봄이 오지 않는다.

꿈을 위한 진혼곡(Requiem for a Dream). 그러니까 이 영화는 ‘꿈은 죽었다’는 전제를 깔고 출발한다. 마약이 꿈을 죽인다는 얘긴가 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속단하긴 이르다. <레퀴엠>은 마약 근절 캠페인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뭔가에 병적으로 의존하고 집착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한다. ‘중독’은 허황된 꿈도 비루한 삶도 삼켜버리고 마는 거대한 블랙홀이라는 얘기.

사라는 TV에 출연해 만인의 연인이 되길 꿈꾸고, 해리는 아름다운 연인과 오래오래 행복하길 갈망하고, 마리온은 일과 사랑 모두를 성취하고자 하며, 타이론은 한몫 단단히 잡겠다고 벼른다. 그러나 그들은 ‘winner’가 되기엔 너무 무기력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TV가, 초콜릿이, 다이어트 약이, 헤로인이 제공하는 판타지 속으로 숨어버린다. 정신분열로 정신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한쪽 팔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마약상들의 섹스파티에 제 발로 걸어갈 때까지, 그들은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이들의 파멸을 지켜보면서, 그 위대하다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미미한가를 받아들이는 건 고통스럽다.

<레퀴엠>은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작가 허버트 셀비 주니어의 소설이 원작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아메리칸 드림이 “대중의 거대한 아편”이라는 작가의 신념에 동조하며, 먼저 이미지로 관객을 세뇌시킨다. 이미지의 구조와 리듬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심리상태뿐 아니라 물리적 감각까지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는데,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이 ‘주관적 리얼리티’다. 애니메이션에 준하는 감각적 영상, 그 형식적 기교에 의미와 이야기를 심은 것이다.

약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장면 같은 건,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주사를 놓고, 혈관에 약물이 스며들고, 동공이 확대되는 일련의 과정이, 리드미컬한 몽타주로 표현된다. 대상은 극도로 클로즈업돼 있고, 화면 전환은 재빠르며, 사운드는 과장돼 있다. 중독자들의 소비 패턴, 집착의 과정이 그러하다는 것. 환각상태에서 눈과 귀에 걸쳐진 이미지는 왜곡돼 있고, 이리저리 점프하며, 때론 빨리 때론 천천히 감긴다. 이러한 중독과 환각의 체험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돼, 급기야 냉장고가 괴물로 변해 덮쳐오는 우스꽝스러운 환상마저도 공포스러워진다. 이쯤 되면 “<레퀴엠>은 마약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마약 그 자체”라는 한 평자의 말을, 수긍하게 된다.

보는 이의 가슴에 돌덩이를 매달고야 마는 이 영화의 또 다른 힘은 배우들의 연기다. 제니퍼 코넬리는 <뷰티풀 마인드> 이전에 선택한 이 작품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자레드 레토는 제법 긴 필모그래피 위로 인상적인 주연작을 보탰다. <무서운 영화>에서 실없이 웃기기만 했던 말론 웨이언즈의 진지한 연기 변신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압권은 엘렌 버스틴이다. 늙고 외로운, 기댈 데 없는 가련한 여인의 비참한 말로를 체현해 낸 엘렌 버스틴의 연기는 ‘신기’ 또는 ‘귀기’라고밖에 달리 묘사할 단어가 없다. 그녀가 약물에 취해 이를 덜덜거리면서, “모두 날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웅얼거릴 때 그 연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데 그쳤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레퀴엠>은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국내 수입 추천을 거부당한 전력이 있다. 미국 개봉 당시에도 NC-17등급과 R등급 두 버전으로 개봉되기도 했는데, 국내 수입 심의를 통과한 것은 후반부의 난교파티 장면에서 2초 정도가 삭제된 R등급 버전이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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