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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파리, 방랑의 아들을 품다
2001-03-28

프랑스 영화계에서 활동한 다양한 국적의 영화인들

파리는 18세기 이래로 유럽의 수도라고 불러도 전혀 과언이 아닌 도시였다. 20세기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대륙 자체가

예전만큼 국제무대에서의 정치적 경제적인 힘에서 많이 밀리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파리란 도시가 자랑하는 문화적인 힘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문화적인 힘 중 상당부분은 이 도시가 외국의 예술가들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어느 나라

출신이든간에 충분히 개성적인 예술가라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설혹 그것이 상당부분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생각을 이 도시는 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코스모폴리탄한 분위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리고 굳이 국제적인 성공을 노리는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수업의 장소로 이만한

도시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 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파리로 몰려드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헤밍웨이를 비롯한 ‘로스트 제네레이션’에

속하는 미국작가들이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의 경우만 보더라도 세계 각국의 영화를 이만큼 다양하게

볼 수 있는 도시가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수업의 장소로 이곳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부터 프랑스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영화업계에 종사해왔으며 그중 어떤 사람은 아예 파리를 정주의 땅으로 삼기도 했다. 이번에는

프랑스영화계에서 자신의 경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룩한 외국의 영화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파리에 스며든 동유럽의 향기

프랑스영화계에 최초로 외국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영화인들의 진출이었다. 혁명 이후

달라진 사회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러시아인들이 대거 파리로 몰려들었고 이중 상당수는 본국에서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도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하고 조셉 에르몰리에프의 선도로 알바트로스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이 회사의 사장격인 알렉산드르 카멘카는 제정 러시아시대

은행가 집안 출신으로 막강한 자금력을 활용해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파리에 와 있던 러시아의 인기배우 이반

모주킨, 나탈리 리셍코 등을 배우로 기용해 영화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자크 페데, 르네 클레르 등 새로운 프랑스 감독을 발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드미트리 키르사노프, 알렉산더 볼코프 등도 당시 러시아 출신감독으로 프랑스에서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20년대 이후 프랑스에 들어온 외국 영화인들 중 오늘날 주목해야 될 사람들은 감독이나 제작자들보다는 스탭으로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대장치나 미술장치에서의 동유럽 출신들의 기여는 압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러시아 출신의 라자르 미어슨이다. 르네 클레르의 <파리의 지붕 밑> <우리에게 자유를> 등의 영화에서 미술을 담당한 그는

스튜디오에 실물에 거의 비견할 만한 세트를 짓되 가급적이면 실물보다 더 ‘표현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르네

클레르 영화를 통해 접하게 되는 파리의 거리는 그리하여 실제의 파리보다 더 ‘파리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이 라자르 미어슨의 직계 제자이면서 나중에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인물이 헝가리 출신의 알렉산드르 트로네이다. <파리의 지붕 밑>의

촬영현장에 구경갔다가 우연히 미어슨을 알게 되어 그의 조수가 된 트로네는 스승의 미술적인 원칙을 좀더 철저히 함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파리의

이미지가 세계적인 것이 되도록 했다. 30년대 초반 미어슨이 미술감독을 맡은 영화에 조수로 참여했던 그는 1936년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에

참여하면서 독자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안개낀 부두> <새벽>을 거쳐 <인생유전>에 이르는 마르셀 카르네의 황금시대의 작품에 그는

각본을 맡았던 자크 프레베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40년대에서 5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프랑스영화가 바로 마르셀 카르네의 작품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 영화들에서 구현된 파리의 이미지가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유통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트로네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화가로 성공할 꿈을 안고 파리에 온 이 헝가리 청년이 그려낸

파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가 되었던 것이다. 트로네는 이 영화들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자 나중에는 할리우드의 초청을 받아 <파라오의

땅>(하워드 혹스), <하오의 연정>(빌리 와일더) 등의 영화에서 미술을 맡았고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빌리 와일더)로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된다.

물론 트로네적인 무대장치가 나중에 누벨바그 세대들에 의해 비판받게 되는 프랑스영화의 ‘질의 전통’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조형적 컨셉을 일관되게 밀고나감으로써 ‘시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는 미학에 그가

기여한 몫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새벽>을 만들 당시 프로듀서가 제작비를 줄이려는 의도에서 프랑수아(장 가뱅)가 농성을 벌이는

호텔 건물을 원래보다 한층 낮추어서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했을 때 트로네가 끝까지 반대해 원래대로 관철시켰다는 에피소드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영화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 카르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다름 아닌 인물과 그가

처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되면 이것이 단순한 예술가적인 완고함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유럽과 할리우드를 오간 영화청년, 보리스 카우프만

카르네 영화는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무대장치도 실제의 것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트로네의 손을 거친 그 무대는

확실히 양식화된 어떤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실제의 파리의 뒷골목에 흡사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인물의

심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풍경이다. 바로 이 인위성 혹은 인공성 부분에 대해 나중에 누벨바그의 젊은 비평가들이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위성 부분에 대한 안티 테제가 될 만한 것이 전전의 프랑스영화에 없었나 하는 질문을 던져볼 만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르누아르나 비고가 전후에 새로운 영화문화의 창출에 있어 압도적인 중요성을 띠고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프랑스영화가

인공적인 미의식에 깊게 감염되어가던 1930년대에 영화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현실감각을 되살리는 데 선구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비고는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거의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지만 전후에 <품행제로> <라탈랑트>가 다시 개봉되면서 젊은 영화광들에게

있어 거의 우상적인 감독으로 떠오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비고의 그늘에서 그의 화면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외국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보리스 카우프만이라는 이름의 카메라맨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만든 지가 베르토프(그의 본명은 데니스 카우프만이다)의

이복동생으로도 널리 알려진 보리스 카우프만은 데니스, 미하일의 두형이 혁명 뒤에도 러시아에 남아 혁명적 정신을 현양하는 전위적인 작업을

벌인 것에 비해 자신은 파리로 망명해 당시 단편영화를 만들던 영화청년 장 비고의 조력자가 되었다. <니스 보고서>에서 사실상 공동감독으로

비고와 일했던 그는 이후 <품행 제로> <라탈랑트>에 이르기까지 비고 영화 특유의, 꾸밈이라곤 전혀 없는 생생한 현실을 포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보리스 카우프만은 그뒤 2차대전중에는 캐나다로 건너가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끝나고는 미국으로 가서 엘리아 카잔의 카메라맨이

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워터프론트> 같은 히트작에서 촬영을 맡음으로써 성가를 올렸다. 아무래도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의 작업이므로 비고 영화에서와 같은 혁신적인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몇몇 장면에서의 극히 다큐멘터리적인

박진감은 역시 보리스 카우프만의 공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형인 지가 베르토프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그의 행로는 기묘한 감이 있다. 형이

혁명영화의 전위가 되었다가 정치적인 좌절을 맛보았다면 동생인 보리스는 일찍 유랑의 길을 떠나 프랑스에서 혁신적인 영화제작에 참여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서서히 침몰해가는 할리우드에서 영화작업에 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혈연적 유대를 좀더 확장해보면 미국영화와 러시아영화

사이의 거리는 적어도 일정시기까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그리 큰 것이 아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심지어 에이젠슈테인도

할리우드를 찬미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작업하기를 열망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건 확실히 억측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영화계에 외국 영화인들이 다시 대거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반유대주의의 득세로

인해 유대계 영화인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을 떠났으며 파시즘에 반대하는 입장의 영화인들 또한 고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 영화인력의

거의 3분의 1이 고국을 등지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이중 상당수가 일단은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프리츠 랑, 빌리 와일더, 로버트

시오드마크, 오토 프레밍거, 아나톨 리트박 등이 프랑스에서 영화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들은 결국 프랑스에 정착하지 않고 대부분 할리우드로 떠나고

만다. 프랑스 자체가 현실적으로 당시 유럽의 정치적 정세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파리에 정착하지 않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화산업이 처한 상황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프랑스 영화산업은

할리우드만큼 체계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특히 장인적인 기질의 감독들에게는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온 감독들은 대개 한두편 정도 프랑스에서 작업을 한 다음에는 대부분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독일 출신 감독 중 프랑스영화계에 비교적 잘 적응한 감독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막스 오퓔스이다. 나중에 프랑스 시민이 된 이 자르브뤼켄

출신의 유대인은 베를린에서 급진적인 연극운동에 참여한 뒤 아나톨 리트박의 조연출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리벨라이> 같은 영화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바로 프랑스로 이주했다. 유대인인데다가 정치적인 연극에 가담했던 전력을 고려할 때 그가 독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리벨라이>의 프랑스어판을 만들면서 프랑스에서의 작업을 시작한 그는 19세기적인 통속 로맨스물에 세련된

미의식을 주입함으로써 자신의 성가를 높였다. 프랑스에서 6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결국 할리우드로 건너가 <미지의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등의 걸작을 만들어냈고 40년대 후반에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윤무> <롤라 몽테스> 같은 영화로 작가로서의 황금기를

장식하게 된다.

그의 대표적인 상업적인 성공작, 즉 <리벨라이> <윤무> 같은 작품들이 아르튀르 쉬니츨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쉬니츨러 소설에서 묘사된 1차대전 이전의 비엔나를 무대로 한 사랑이야기를 자신의 원점으로 삼았다. 대개는 상류계급 출신의

장교와 하층계급의 여성간의 비련을 씁쓸하게 그리는 이 소설들이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무엇을 소재로 삼던지간에

거기에는 쉬니츨러의 소설 특유의 세련된 아이러니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기게 된다. 그의 작가적 징표가 되다시피 한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도 말하자면 감정의 미묘함을 화면에 충실히 담아내기 위한 그의 시도에서 출발한 것일 게다.

프랑스, 정착지 아닌 정거장

오늘날 그의 최고 걸작으로까지 꼽히는 <롤라 몽테스>는 언뜻 보면 당시 유행하던 ‘질의 전통’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유럽 여러 나라의 상류사회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던 여인 롤라 몽테스가 지금은 영락해 서커스단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본다는 이야기 자체는 전형적인 ‘비운의 여인’의 플롯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퓔스는

극중극의 형식 그리고 비연대기적인 플래시백을 도입해 중층적인 플롯을 구성하고 그를 통해 스펙터클로서의 ‘연애’에 대해 성찰하게끔 함으로써

그 통속성에 일정한 거리감을 부여한다. 젊은 시절 유럽의 사교계에서 많은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고 그리하여 바바리아 국왕의 총애를 받아

바바리아 공국을 거의 괴멸직전으로까지 몰고갔던 그녀는 이제는 별볼일없는 서커스단에서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재현해 관객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만족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만큼 글래머러스한 광휘를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 게다가 육체적으로 극히 쇠잔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이 여인이 전설적인 존재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단돈 1달러에 롤라의 손에 키스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사회자의

제안에 현혹되어 긴 행렬을 이룬 관객을 트랙백하면서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은 스펙터클의 배후에 잠재해 있는 그 착취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프랑스의 문화적 분위기가 외국인에 대해 비교적인 우호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프랑스영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외국 작가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즉 외국 출신의 유명 감독들이 없었다고 해서 프랑스영화에 대해 우리의 이미지 자체가 바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확실히 동시대의 할리우드와 비교해보면 명백해진다. 이를테면 우리로서는 에른스트 루비치, 프리츠 랑, 앨프리드

히치콕이 없는 할리우드영화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할리우드가 애초에 동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된 업계라는 점 그리고 적어도

40년대까지는 계속적으로 유럽의 영화인력을 받아들이면서 자기갱신을 꾀해왔다는 점들을 생각하면 통념과는 달리 할리우드는 아주 국제성이 높은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영화업계는 전혀 배타적인 조직이 아니었지만 그 시스템의 취약점으로 인해 포용력

자체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프랑스영화의 국제성은 어쩌면 그 ‘정거장’으로서의 유용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착점으로서보다는 유랑을 강요당한 작가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의 활로를 찾는 그런 곳으로서 말이다. 과연 40년대 후반 할리우드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좌익전력이 있는 많은 작가들이 미국을 뜨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오자 줄스 닷신, 조셉 로지를 비롯한 많은

미국의 작가들은 역시 파리로 들어와 자신의 영화작업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