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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로 그려낸 소녀의 성장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
2002-07-25

오!황홀한 활력이여

오, 미야자키!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든,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든, 미야자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 활력의 엔터테인먼트는 한여름 밤의 축제에 달려온 온 가족을 즐겁게 해주고도 남는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종이 인형과 뒤엉켜 날아오다 불규칙적으로 펄떡거리는 용은 <스타쉽 트루퍼스>를 괴멸시켰던 거대 곤충들의 활극보다 섬뜩하다. 무너져가는 연통을 밟고 아슬아슬하게 달려가는 센의 모습은 <루팡 3세-카리오스트로의 성>과 <미래 소년 코난>에서부터 보아왔던 곡예 레이싱의 향수에 젖게 한다. 미야자키는 미야자키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토록 즐거운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즐거움을 줄 수 있겠는가?

이 영화는 초기 원화 공정 외에는 거의 디지털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센이 꽃밭을 헤쳐가는 장면이나 건물 안의 3D 조형물 등 몇몇 두드러진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셀과 구별할 수 없는 전통의 맛을 전해준다. 디지털의 풍성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2D 셀애니메이션의 자연스럽고 투명한 수채화의 느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의 손길은 알게 모르게 영화 속에 스며 있다. 무엇보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물에 깃들어 있다. 우리에게 컴퓨터그래픽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여주었던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에서부터 물은 디지털의 전문 분야였다. 센이 헤엄치고 있는 디지털 물결 역시 그에 못지않게 눈부시다. 온천장의 바깥 수면은 햇살에 반짝거리고, 신들이 몸을 담그고 있는 탕 안의 물은 출렁거리고, 그 위의 수증기는 하늘거린다. 오물신이 꾸역꾸역 뱉어내는 구정물 방울 하나하나까지 아름답다. 그 레이어 한장 한장에 애니메이터들은 훌륭한 이름을 주었던 것에 틀림없다.

수직의 물을 건너 수평의 물로

센은 온천장에서 하나의 큰 과제를 해결하고, 하나의 큰 문제를 만든다. 앞의 일은 십리 밖에서도 악취가 나는 오물신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 몸에서 고철과 쓰레기를 뽑아내 강의 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뒤의 일은 빗속에 외롭게 서 있는 얼굴없는 귀신 가오나시를 불러들여 온천장의 식구들을 탐욕에 물들게 한 것이다. 오물신은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이 만들어낸 거대한 죄과이며, 가오나시는 도저히 허기를 달랠 수 없는 그 탐욕의 공허한 실체다. 거기에 유바바에 붙잡혀 있는 하쿠의 이야기가 뒤얽혀 매듭조차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물의 동아줄이 그들을 묶어놓고 있다.

센은 수직의 물인 온천장의 아래로 내려와 수평의 물인 바다의 저편으로 건너간다. 그녀가 타야 할 것은 구식의 편도 기차. 그것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에서 태어나 마쓰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로 이어져온 기차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세계, 죽음으로 향한 기차다. 이승에서 벗어나 신의 세계로 들어섰던 치히로는, 이제 센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돌아오지 못할 저승으로 건너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바다를 건너는 기차의 길은 평온하다. 덜컹거리는 차창 밖은 수없는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은 마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만화판에서 도루쿠의 신성황제가 나우시카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청정한 피안의 세계 같다. 그때 나우시카는 말했다. “천년, 혹은 그보다 좀더 지나 네가 좀더 넓고 강해졌을 때,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조금 더 현명해져 있다면….” 천년. 그것은 완전한 무한이 되지 않은 무한이다. 센(千)이 치히로(千尋)라는 이름을 되찾아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 걸까? 천(千)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천을 찾아야 할(千尋) 운명인 것인가? 아니다. 어쩌면 저 고즈넉한 풍경의 마을들을 지나 센이 가고 있는 이승 너머의 그곳은, 그녀의 생이 시작되기 이전의 어떤 곳이 아닐까? 왜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천년 뒤의 미래로 달려가는 기차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단지 과거로, 아무것도 없던 어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꼬마야, 돼지들을 부탁해

기차는 멈추어 섰다. 달랑거리는 전등의 안내를 받아 센과 친구들은 유바바의 언니 제니바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는 알아채게 된다. 복잡하게 뒤얽힌 이야기일수록 그 해결은 단순하다는 사실을. 애초에 저 머리 큰 마녀들이 왜 나왔을까? 무수한 은유로 뒤덮여 있던 물의 모험은 결국 뒤꿈치 쿵쿵쿵으로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오즈의 마법사>였던 게 아닌가? 하쿠가 용의 모습으로 마중을 나오고, 센을 태우고 하늘을 난다. 센이 어린 시절 강물에 빠졌던 기억을 되살리고, 그 기억이 강의 신이었던 하쿠의 이름을 되살려낸다. 소년과 소녀의 얼굴로 서로 마주보며 하늘을 떨어져 내려오는 두 사람. 치히로의 얼굴에 반짝이며 솟아나오는 눈물이 이 수수께끼로 가득 찬 물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때 물에 빠져 죽음 가까이 있던 그녀에게 누군가 그녀를 불러줄 이름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속해야 할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 누군가 나를 불러줄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지.” 10살짜리 꼬마에게 미야자키는 이렇게 말한다. 꼬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돼지 두 마리의 손을 잡고 극장 밖을 나간다. 돼지들이 길을 잃지 않게 잘 이끌어주렴, 꼬마야.이명석/ 만화평론가·프로젝트 사탕발린 운영중 www.sugarspr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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