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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컬트 <허공에의 질주>

가족, 버릴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가족은 비극이다. 속옷 한장도 모친에게 의탁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비극은 비극이다.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결국 나를 끝까지 지켜 본 건 그렇게 이 갈고 싸우던 가족뿐이더라”는 어떤 이의 글에서 느낀 것도 가족은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정말 깨는군. 그럼 우리 그만 가족하지, 이렇게 끝날 수 있는 관계라면 비극이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는 자유인이다” 떠들고 다녀도 유전자에서 발가락을 까딱거리는 사소한 습관까지 평생을 가족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라는 말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도 참으로 쓸쓸하게 들린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허공에의 질주>를 보면서도 앞의 글을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하다가 일이 꼬여 수배자가 된 운동권 아빠와 엄마, 그리고 부모와 함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전전하며 사는 형제. 두 형제는 속깊은 우정을 나눌 만한 친구도, 애틋한 첫사랑도, 미래에 대한 꿈도 키울 여유가 없다. 가족의 신분이 노출되는 기미가 보이면 이름과 머리 모양, 눈색깔까지 바꿔가며 다른 도시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파쇼적인 운동권 꼰대였다면 오히려 이야기는 단순해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위태로운 존재조건을 이어나간다.

비극은 여기에 있다. 만약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책임한 엄마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면 이건 차라리 사회드라마에 가깝지 가족드라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없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딜레마를 만드는 기묘한 관계가 가족드라마다. 자식을 떠안고 가려는 아버지의 책임감이 대니를 사회와 미래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처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지는 그것이 가장 선량할 때조차도 자식에게 어떤 식으로든 트라우마를 남긴다. 아니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다. “나, 엄마가 맨날 과외공부시켜주고 보약 달여 먹이면서 조기유학 보내줘서 지금 떼돈 벌고 잘살고 있단 말예요”라고 말한다면 그를 향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 부모는 자식의 자의식조차 완전히 지워놓을 만큼 인간 망가뜨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비극이 비극인 건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해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을 해체하자거나 스무살이 되면 외국처럼 무조건 독립해야 한다든가 하는 주장을 하는 건 번짓수가 틀린 결론인 것 같다. 아무리 이혼하는 부부나 독신 가구가 늘어난다고 해도 가족이 드리운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대니는 왜 피자배달원으로 변장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러 갔으며,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80대 노인은 잔디깎이 기계를 타고 여러 달을 걸려 수십년간 의절했던 형을 만나러 갔겠는가.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인터뷰에서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받았을 때 농담처럼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가족을 내다버릴 것 같지는 않다.(그럴 거라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지). 가족이란 버릴 수도 그렇다고 전면적으로 화해할 수도 없는 관계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떠들면서 너는 왜 가족을 만들고 싶어 안달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차피 사는 게 한편의 재난영화라면 맨날 똑같은 지진이나 화산폭발의 피해를 입는 것 보다는 가끔 외계인의 침입도 당하고 치명적인 전염병에도 감염되는 게 좀 더 재미있게, 혹은 덜 지루하게 끔찍한 인생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해서…라고 둘러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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