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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기대, <우렁각시>
2002-08-27

■ Story

주윤발을 동경하는 청년 건태(고구마)는 총기류를 밀매하는 철공소의 종업원이다. 어느 저녁 이상한 노인에게 친절을 베푼 대가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얻는데, 거기에 담아둔 우렁 하나가 어여쁜 각시(채명지)로 변해 집안일을 도맡아 해준다. 철공소 옆에는 우렁 키우는 할머니(최선자)가 살고 있다. 힘세고 정의로운 할머니는 죽은 할아버지의 반지를 가로챈 사기꾼 용백(기주봉)에게서 반지를 되찾고 싶어한다. 반지와 항아리를 둘러싸고 이 동네의 모든 사람이 얽혀든다.

■ Review

앙드레 바쟁은 영화를 분신 혹은 거울을 지향하는 인간의 고대적인 꿈이라 불렀다고 한다. 때문에 혹자는 영화가 육체적인 자아에 필적하는 상상적인 자아를 창조하려는 미라 콤플렉스의 산물이라고 했다. 영화 <우렁각시>는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기웅 감독이 표방한 대로, <우렁각시>는 한국의 주류 상업영화는 물론이고 비주류 독립영화가 확립해온 모든 형식적, 내용적 관습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이로 인해 영화는 감독의 천방지축 상상력을 억누르거나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거기에서 남기웅이라는 한 개인의 상상적 자아를 구성해온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풍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중에서 우렁각시 설화를 듣자마자 사로잡혀서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는 무릎을 치게 만든다. 남성이 여성에게 갖고 있는 모든 기대를, 그것이 현실적이거나 판타스틱하거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우렁각시가 아니겠는가. 예쁜 처녀가 어디선가 나타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으면서 남자에게 필요한 모든 보살핌을 제공한다니! 이건 가부장제니 남성 이기주의니 하고 따지기에도 민망할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욕망이다. 그래서 귀엽다(물론 이 설화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남자가 우렁각시에게 함께 살자고 요청하게 된 순간 둘의 관계는 갑작스럽게 현실의 복잡함 속으로 추락한다. 결혼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내포한다).

주윤발은 그의 청소년 시절에 영웅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건태가 철공소 사장에게 주윤발에 관해 떠벌릴 뿐만 아니라, 그가 사는 곳(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판타스틱한)에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 가운데 신과 손가락을 마주치는 인물만 따로 떼어 주윤발로 변형시킨 커다란 그림이 놓여 있다. 남성 신파적 감수성, 나름의 정의에 몸바치는 용기, 절정의 순간에 연출되는 육체의 퍼포먼스 같은 것들을 전시했던 <영웅본색>류의 주윤발 영화에 한국의 꼬마 남자들이 얼마나 환호했었는지.

♣ 연못에 살던 우렁이들이 우렁각시에 이어 일제히 튀어 나왔다.(왼쪽부터 첫번째)♣ 우렁이들을 키워팔아 먹고 사는 우렁장사 할머니가 빼앗긴 반지를 찾기 위해 애태우는 사이(두번째)♣ 이상한 술집을 경영하고 모종의 정치권력도 갖고 있는 용백과 그의 썰렁한 수하 깡패들(세번째)♣ 건태와 우렁각시는 살림살이가 아닌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된다(네번째)

이현세의 만화 혹은 이장호의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 역시 이 세대에 중요했다는 것은, 16년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속 캐릭터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조상구가 건태에게 비전과 용기를 속삭이는 신비의 인물로 나온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기웅 감독은 그룹 사랑과 평화, 산울림의 음악도 사랑했을 것이다. 촌스러운 이름의 클럽, 요새 눈으로 보면 키치적으로 보이는 실내 장식, 그러면서도 하얀 양복과 나비 넥타이로 정성들여 치장한 나이든 밴드들은 그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80년대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남기웅 감독은 이러저러한 기억 요소들을 건져내어 우렁각시 설화와 반죽한 뒤 재기발랄한 미술 작업을 통해 창조된 공간 안에 비벼 넣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타란티노나 쓰카모토 신야가 아니라 뤼미에르나 멜리에스 같은 초기영화의 이미지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한다. 뉴미디어가 다양한 시각예술들을 수렴하면서 기발한 상상력을 개진한다는 점에서 100년 전의 영화와 지금의 영화 사이에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이렇게 보자면 <우렁각시>는 감독의 의도와 그 결과물이 안전한 상업영화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장편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존재를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남기웅 감독은 전작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2000)에서도 디지털의 기술적, 경제적 가능성을 극단까지 활용한 바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색감을 비롯하여 더 안정되고 자신감 있는 결과를 얻어냈다.

그런데 이제 디지털은 더이상 기술적, 경제적인 지평에서만 논의되고 제작되지는 않는다. 적은 돈을 들여 효율적으로 제작하기 위한 주변적인 도구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영화의 중심으로 진입해오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디지털영화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영화다. <우렁각시>의 제작진 역시 큰돈 들어가야 마땅한 판타지영화를 4억원 들여서 만들었다는 솜씨를 뽐내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4억원‘이나’ 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더 깊이 옮아갔으면 좋겠다. 문제는 단순하다. 관객의 관심사는 돈을 줄여 썼느냐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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