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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를 찾아온 외부자의 한국영화에 대한 인상
2002-12-13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

나는 한국영화에 대해 사실은 매우 ‘아웃사이더’라는 점을 우선 독자들에게 양해 구하고 싶다. 영국에서 태어나 1965년부터 캐나다에 거주한 내가 제일 처음 한국영화를 접한 것은 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아다다>를, 같은해 토론토영화제에서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보면서였다. 그뒤 나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영화를 챙겨보려고 노력했으며 올해도 토론토, 밴쿠버, 그리고 부산영화제에서 열심히 상영실을 드나들었는데, 결론은 올해, 한국보다도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수준 높은 영화들을 낸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인간의 성에 관한 진지한 탐구를 보여준다. 올해의 빼어난 수작 <죽어도 좋아> <생활의 발견> <오아시스> 등이 모두 그런 예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는 전주에서 처음 보았는데 함께 본 한국 관객은 대부분 10대, 20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의 사랑에 대단히 열광했다. 이것은 노인들이 흔히 오해받는 것처럼, 성욕이 전혀 없거나 아무런 개념이 없거나 금욕적이거나 하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사랑에 빠진 미스터 박과 미즈 리를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확연히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에로틱한 것과 포르노그라픽한 것은 영화언어상으로 얼마나 다른지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해준다.

홍상수의 네 번째 작품 <생활의 발견>은 그의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내러티브 형식을 두고 실험을 시도했던 이전 세편과 달리, 이 작품은 단선적이고 시나리오로 이미 옮겨진 플롯을 가지고 있지만 대사들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지거나 그날그날 쓰인 것이다. 이런 여건에 비춰볼 때 배우들의 연기력은 대단하며, 특히 경수 역의 김상경은 진실된 연기를 온전히 보여준다. 이 영화는 한 나르시스트적인 사내에 대한 포괄적인 초상을 보여주는데 관객은 특유의 내러티브와 연기력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입과 동정심을 잃어간다.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사내와 뇌성마비 여성의 사랑을 그린 <오아시스>는 내가 매력을 느낄 만한 아이템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할리우드영화였다면 나는 이 눈물을 쥐어짜려는 시도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을 것이다. <오아시스>는 인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자기만의 주관적인 영토도 가지고 있는데,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름직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 커플의 관계가 발전하는 것을 사실적 이미지뿐 아니라 이상화된 판타지의 이미지로도 보여준다. 특히나 여주인공 공주가 잠시 장애 없는 일반인으로 나타날 때 그러하다. <오아시스>는 결함있는 두 남녀의 사랑을 통해, 조용하고 공손해 보이는 이 사회가 어떤 식의 정신적 린치를 집단적으로 가할 수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한국에서의 전통적인 성의 관계는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또 가정 내 폭력은 이러한 가족의 구조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성의 관계를 진지하게 문제삼는 영화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 예로 이창동과 김기덕을 들 수 있겠다. 이창동은 <초록물고기>에서 이 변화하는 가족관계를 보여주었으며 김기덕은 <나쁜 남자>를 통해, 강간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남성들의 강간판타지를 어마어마한 강도로 전시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김수용의 <갯마을>(1965)과 <산불>(1967)을 보면서 처음 주목했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감동함과 동시에 그들의 성적 만남의 거친 폭력성(그리고 그것은 어찌어찌하여 사랑하는 관계로 귀착된다)에 놀랐던 나는 이번 김수용 회고전에서 그와 전혀 다른 성향의 작품들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성에 대한 이러한 새롭고 진지한 탐구 외에 또 내 눈에 두드러져 보인 최근 한국영화의 특징은,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는 24편의 장편 한국영화 중 무려 6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여성영화제’라고 이름붙은 영화제도 아닌데 한자리에 이토록 많은 여성 감독의 작품들이 모인 것은 한국영화계에서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한다.

이정향의 <집으로…>는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공히 환대를 받은 아름다운 장편영화이며 올해 작품은 아니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대단히 참신하고 정제된 영화였다. 젊은이들에 관한 영화이면서도 섹스 비슷한 것도 안 나오고 로맨스도 아주 희미하게만 나온다는 점이 아주 ‘신선’했다. 작금의 할리우드영화는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하면 장르가 코미디건 로맨스건 심지어는 공포영화든 간에 오로지 섹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아니던가.

반면, 이와는 달리 오히려 인간의 성에 대한 매우 개방적인 접근을 통해 ‘신선’하다는 느낌을 준 여성 감독의 신작들도 두편을 발견했다. <밀애>와 <질투는 나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두편 모두 영화의 강점은, 사랑(혹은 섹스)을 갈망하는, 경쟁심과 남성 호르몬이 승한 이성애자 남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서 비롯된다.

또, 노조 내에서 세대와 서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극적인 갈등을 다룬 이지영의 <철로위의 사람들>, 반체제적이라고 추방당한 한국 통일운동의 지도자 송두율을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홍효숙의 <경계도시> 등을 통해, 우리는 한국 여성 영화인들이 앞으로 더욱 한국영화에 지평을 넓힐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가정과 일터 사회 모두에서, 정해진 규범에 끊임없이 도전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피터 리스트/ 몬트리올 콩코디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