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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독
2003-02-13

설 연휴 직전인 1월29일, KBS1TV는 <수요기획-아프간으로 간 영화감독>(연출 지혜원)을 방영했다. 흙바람과 질병과 아사의 땅 아프간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 일가의 촬영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던 마흐말바프와 그의 가족은, 우리가 영화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것들과 가장 먼 곳에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보통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시계는 나와 함께 늙었어”라고 중얼거리던 아프간 노인(자기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현장에서 캐스팅돼 영화에 출연했다)이 마흐말바프의 손을 붙잡고 “당신은 가장 좋은 친구야”라고 말할 때, 눈물을 참기 힘들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더이상 삶이 축복이 아닌 그 저주의 땅에서 그는 어떻게 영화를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1달러짜리 연고가 없어 살이 썩어가는 아이를 보고, 흙바닥 위에서 질병보다 먼저 찾아온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여인들 곁에서, 그는 어떻게 영화라는 공정 복잡하고 간접적인 양식에 몰두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찍는 사람이다. 물질적 구조의 길, 그 직접성에의 충동을 그는 어떻게 이겨냈을까.

TV를 보고 궁금증이 조금 풀렸다. 그는 이기지 못했다. 마흐말바프는 영화에 몰두하지 못했다. 피부병에 걸린 아이를 보면 연고를 사다 발라줘야 했고, 배고파 우는 아이를 보면 돈을 쥐어줬다. 그리고 칠판과 연필과 공책을 사줬다. 그의 영화 만들기는 그래서 계속 지체된다. <칸다하르>(2001) 촬영 때를 회상하며 그의 조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감독님의 눈물만 보였다. 그는 거의 한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프간 아이들의 굶주림을 목격한 이후로 음식 가까이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빵과 약뿐만 아니라 카메라와 필름도 기증하며, 아프간 감독의 프로듀서도 자청해 맡는다. 그는 아프간 아이들의 병과 굶주림만큼 아프간의 영화 부재를 가슴아파한다.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그의 신뢰는 양자 모두 너무 커서,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취향과 윤리 사이에서 그가 어떻게 균형을 찾았을지에 대한 내 궁금증이야말로 휴짓조각으로 느껴진다.

곤혹스런 사실은, 탈레반 정권 붕괴 뒤에 다시 극장을 찾은 아프간 사람들이 마흐말바프의 영화가 아닌 미국영화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액션이 있는 게 좋아요. 전쟁영화도 좋고, 아, 러브 스토리도 좋지요.”(한 아프간 관객) 명예와 안정을 뒤로 하고 국적의 경계를 넘어 자기들의 상처를 눈물로 보듬는 영화보다, 자기들의 가족과 터전을 살해한 나라의 환각적인 영화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그 아프간 관객의 멍청함을 비난하기는커녕, 차라리 그의 발언을 영화의 태생적 다면성과 모호함의 근거로 들이대고 싶은 유혹을 못 이기겠다. 다만, 마흐말바프 같은 인물이 그 모호함의 집에 머무르려는 우리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지, 아니면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을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