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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2003-03-28

2001년 7월 뉴욕의 한 극장을 찾은 배우 팀 로빈스에게 화난 얼굴의 부부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제 기쁘시겠군요”라고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팀 로빈스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뭐 때문에요?”라고 묻자 그 부부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의 네이더가 부시를 우리에게 안겨줬잖아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는 민주당 후보 고어를 닭똥만큼 앞서 대통령이 됐다. 승패를 가른 곳은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강했던 플로리다였다. 여기서 부시는 불과 2000여표 차로 고어를 따돌렸다. 한편 녹색당 후보 랠프 네이더는 플로리다에서 9만6700표를 얻었다. 할리우드의 진보적 지성 팀 로빈스와 그의 아내 수잔 서랜던은 녹색당을 지지했고, 열렬한 선거운동을 펼쳤다. 팀 로빈스에게 화를 낸 그 부부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네이더가 얻은 표 중에서 2천표만 고어에게 갔어도 백악관의 주인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 표라면 두 스타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때 젖과 꿀이 흐르던 문명의 발상지를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미국의 공습을 지켜보며, 팀 로빈스의 선택을 다시 떠올렸다. 고어라면 이 전쟁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팀 로빈스와 수잔 서랜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선택을 지금에 와서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밤새 마감할 거라며 고프지도 않은 뱃속에 밥을 꾸역꾸역 밀어넣을 때, 식당의 TV에선 맨몸으로 전쟁을 막겠다며 바그다드에 남은 인간방패 한 사람(그의 이름은 배성현이었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화 저편에서 그가 편안한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세요. 전 잘 있어요. 이라크 사람들 걱정해주세요. 다 같은 사람들이잖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짐승처럼 더욱 가열차게 남은 밥을 전부 뱃속에 처넣었다. 사람의 탈을 썼다고 정말 다 같다고 믿을 수 있을까.

팀 로빈스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맹공에 맞서 풀뿌리운동을 역설하며 신념을 지켰을 때 나는 그를 기꺼이 존경했지만, 이 미친 전쟁의 와중에서 아직도 그의 선택을 거리낌없이 좋아할 수 있을까. 혹시나, 부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쏟아진다면, 그때도 여전히 나는 팀 로빈스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념의 확증이란 가능하기나 한 걸까.

어려운 문제다. 아마도 권영길 후보가 50만표를 더 얻고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됐다면 뉴욕의 그 부부의 분풀이가, 아니 그보다 더한 저주가 누군가에게 퍼부어졌을 것이다. 어떤 신념도 확증할 수 없을 것이다. 신념을 지킴으로써 언젠가 그것이 예기치 않았던 불행을 세상에 초래하는 데 기여한다 해도, 오늘 그 신념을 지키는 것 외엔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팀 로빈스는 “전략적으로 투표하는 대신 양심에 따라 투표했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그 길 외엔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당선은 어제의 전략적 승리였지만, 오늘 우리는 그가 개전 3시간 만에 미국의 대이라크전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참담한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그 성명도 전략일 것이다. 나는 전략이란 걸 알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팀 로빈스를 여전히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