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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울음 뒤에 또다른 울음이 있었다
2001-05-09

<인디안 썸머> 음악감독 미하엘 슈타우다허

1965년생1994년 독일 함부르크 음악대학 졸업1999년 미국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nia) 영화음악 고급과정 수료<애니깽>(96) 음악감독, <인디안 썸머>(2001)

음악감독

돌아갈 곳이 없어 떠날 수도 없는 여자가 있다.

세상을 등지려는 순간조차 가지고 갈 추억이 없어 망설이는 여자에게 남자는 ‘생애 가장 따뜻한 한순간’을 선물한다. 남자는 나중에야 안다.

자신이 준 추억이 오히려 그녀의 떠날 결심을 굳힌 것을. 차마 얼굴을 맞댈 자신이 없어 문 하나로 간신히 자신을 지켜내는 여자에게 남자는

오열하며 소리친다. “혼자서 울지 않기로 했잖아요. 같이 울자구요.” 그때는 느끼지 못했다. 복받치는 울음을 온몸으로 토해내는 남자와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그저 속으로만 울음을 삼키는 여자 뒤에 그보다 더 낮고 격렬하게 울고 있던 음악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그냥 우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울음은 콘트라베이스와 첼로로, 여자의 울음은 그보다 조금 높은 하프와 플루트로 색깔지워진다. 여기엔 남자배우의 저음대사를 살리기

위한 미하엘의 섬세한 계산이 새겨져 있다. 문 밖의 남자를 비출 때는 대사를 입모양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에 목소리와 같은 낮은 톤의

음악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지만, 문 안쪽의 여자를 잡는 신에서는 밖에서 들리는 남자의 대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보이스톤과 다른 음색의

악기를 선택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인디안 썸머>는 멜로영화치곤 몹시

음악을 아끼는 영화다. “전체적으로 드라이하게 가자”는 노효정 감독의 주문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애초에 드라마틱한 음악 구성을 생각했던

미하엘은 그래서 조금 위축됐더란다. 한국감독들이 꾸며진 소리보다 현장음과 같은 사실적인 소리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유도 있다.

물론 소리가 영상보다 ‘덜’ 대접받는 영화 풍토가 제일 서운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나름대로 균형을 잡은 모습으로 관객을 맞는다. 다행이다.

비록 준비한 곡의 반도 못 썼지만, 영상과 적절히 어우러져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데 일조했다는 하나만으로 그는 만족한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애써 영상과의 조율을 생각해 음악을 배치해 놓으면, 믹싱단계에서 자주 어그러져버리는, 불편한 ‘대화단절’이 사라졌으면 하는 것. 막상 감독의

‘OK’사인을 받고서도 믹싱 뒤에는 전혀 다른 소리가 되어버린 경험이 못내 쓰린 모양이다. 특히 그가 아까워하는 장면은, 신영(이미연)과

준하(박신양)의 도주신. 자동차 추격장면을 위해 미국 파라마운트사 소속의 전문셰션맨으로 이루어진 40여명의 관현악단과 타악기를 동원해 한껏

장중한 분위기를 냈건만 막상 믹싱을 마치고 나자 자동차 엔진소리에 묻혀버렸다.

96년 <애니깽>의 음악감독으로

화려한 데뷔를 꿈꾸었던 미하엘은, 그러나 대종상 수상과정의 추문으로 소리없이 극장에서 사라진 영화와 운명을 같이 한다. 미국에서 1년간 영화음악

수업을 받고 다시 한국을 찾은 그의 손에는 시나리오가 하나 들려있었다. 지금은 <퇴마록>(98)으로 잘 알려진 박광춘 감독의 처녀작이

될 뻔한 <개미지옥>이었다. 불행히도 영화는 '엎어'졌고, 그에게 방황의 끝은 요원해 보였다. 행운의 그림자는 엉뚱한 곳에서 다가왔다.

미하엘의 부인 김정희를 우연히 만난 적 있는 차승재가 연락을 준 것이다. 처음 그가 연결해 준 작품은 김성수 감독의 <무사>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인디언 썸머>가 '회심의' 데뷔작이 되었다. 가을 날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여름날이 될 지, 두고두고 환한 봄날이

될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요즘 그는 많이 행복하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정진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