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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솔직할 순 없다,<싱글즈>의 배우 엄정화+장진영
사진 이혜정문석 2003-07-02

“음… 그러니까… 그건….” 건너보지 않은 돌다리를 향해 발끝을 내뻗듯 조심스럽던 장진영의 태도가 급변한 건 엄정화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였다. “언니 언니, 우리 사진 난 거 봤어?” “어머머머, 어쩜 그렇게 나올 수가 있니… 너는 그래도 예쁘게 나온 거야… 나는 뭐냐?” 재잘재잘 왁자지껄 까르르르. 얼마 전 함께 찍은 패션잡지 사진에서 <미녀 삼총사> <툼레이더> <버추얼 웨폰> 같은 영화를 거쳐 전날의 음주에 이르기까지, 찰싹 붙어앉은 두 사람의 속사포 같은 대화가 시작되자 고요하던 스튜디오가 펄떡거린다.

엄정화와 장진영. 두살 터울인 그들은 <싱글즈>를 찍으며 처음 만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 보였다. 수다를 떠는 동안, 둘은 때때로 언니 동생의 자리를 바꾸기도 했고, 친구처럼 굴기도 했다. “여자끼리 같이 일하면 서로 섞이려 하지 않고, 견제하고 그러는데 참 이상하다”고 스스로도 신기해하면서. 어느 정도였냐 하면, 사진 촬영 도중에는 엄정화가 장진영에게 뭐라고 말하며 푹 팬 원피스의 가슴 부위를 슬쩍 들어 안쪽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까(대체 그 안에 뭐가 있었기에…).

장진영과 엄정화. 사실, 둘은 겉보기엔 완전히 대척점에 놓인 듯하다. 한쪽은 눈, 코, 입에서부터 팔, 다리가 시원시원한데 다른 쪽은 오목조목한 얼굴과 여릿한 체구를 갖췄고, 한쪽은 털털하고 보이시한 매력을 발산하는데 다른 쪽은 귀여움과 섹시함이 뒤섞인 여성적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도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기대고 무릎을 베고 하며 친밀감을 과시한다. 알고보면 굉장히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이.

장진영이 보기에 엄정화는 포용력이 크고 상대방을 잘 배려해주며, 엄정화가 보기에 장진영은 솔직하고 허물이 없다. 일에서도 추구하는 방향은 엇비슷해, 두 사람 모두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뽐낼 수 있으면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강조되는 작품을 갈망하고 있다. 사랑, 우정, 섹스, 결혼, 동거, 미혼모 등 현대 여성이 직면한 문제들을 유쾌하게 정면돌파하며, 생생한 캐릭터가 꿈틀거리는 <싱글즈>의 시나리오를 두 사람이 동시에 집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하나 사소한 공통점. 장진영은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엄정화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각각 연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자매 같고 친구 같은 이들은 이날 한 남자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극중에서 또 한명의 단짝 친구로 등장하는 이범수가 그 행복한 주인공. 어느 날인가 조명을 교체하는 30분 동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어린 시절 이야기며, 꿈이며, 사랑이며, 하는 이야기를 너무도 솔직히 나누게 된 ‘이상한 체험’을 시작으로 셋은 영화 속과 다를 바 없는 우정을 나누게 됐다는 거다. 이범수가 <하면 된다>에서 선보인 말투를 흉내내는 것으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우리 영화 어떻게 되능겨?” “아, 기냥 쭉 잘 되능겨.”

엄정화 | 이유있는 까다로움

“어후, 다리가 너무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그렇지? 아냐, 이상해.” 카메라 앞에 선 엄정화는 시종 종알거리며 코디네이터의 의견을 물었다. 카메라 뒤편의 모두가 ‘이상하긴커녕 예쁘기만 하네’라 생각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구시렁대곤 했다. 그런데도 별로 거슬리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그녀의 애교섞인 말투와 표정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쨍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정상의 가수로 군림해온 그녀의 프로 의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 배우로 확실하게 ‘재발견’된 엄정화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요가 비디오를 출시한 것 외에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지 않은 건 의외의 일이지만, 그녀 말을 들어보면 이 또한 프로 의식의 발로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나리오는 좀 들어왔는데, 별로 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대부분 남자 캐릭터를 뒷받침해주거나 뒷배경에 해당되는 역할이었으니까. 늦게 물이 올랐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걸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던 차에 만난 <싱글즈>는 기분좋게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세상과 당당히 맞설 줄 알고 성적 욕구에도 솔직한 여성인 동미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시나리오의 발랄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 와중에 생각할 여지를 주고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점이 정말 괜찮았어요.” 아닌 게 아니라 동미는 현대 한국사회의 여성들의 고민을 한몸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성친구와의 우정, 사랑, 동거, 미혼모 등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쿨하게 승부한다. <싱글즈>의 동미는 <결혼은…>의 연희와 일면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르기도 하다. 연희가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생각을 품었다면, 동미는 ‘섹스 따로 연애, 결혼 불필요’식의 사고를 한다. 룸메이트인 정준이 사귀던 여자가 갑자기 조건이 좋은 신랑과 결혼을 하자, 동미는 ‘그 계집애는 지금 장사하고 있는 거야. 평생 잘 먹고 잘살려고’라고 말한다. “좀 그렇대요. 내가 내 욕을 하는 셈이니까. 이율배반인가?”

그러고보니 동미 역할이야말로 엄정화랑 딱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초대> 같은 섹시한 노래의 이미지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도발적인 인상 때문인지 실제 엄정화의 삶도 솔직하고 거침없을 거라 여기게 된다. 그런데 반응이 엉뚱하다. “어후, 근데 왜 다들 실제의 내가 동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많이 다르거든요.” 그렇다고 드라마 <아내>에서 보이는 수동적이고 지고지순한 여성의 엄정화의 본모습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란다. “가끔 내게서 도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많은 부분 같진 않아요. 글쎄, 남들도 다 그렇지 않나?”

엄정화의 다음 계획은 가수 ‘컴백’이다. <싱글즈>를 개봉시킨 뒤 곧바로 음반작업에 들어가 8월말이나 9월초 8집을 발표할 계획. “영화? 아무 데나 나갈 순 없고, 좋은 게 주어지면 하는 거죠….” 콧소리에 실린 묘한 여운은 <싱글즈>를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더 뛰어오르고픈 갈망의 메아리 같았다.

장진영 | 당당한 욕망

장진영이 <싱글즈>의 나난 역할을 탐냈다는 건 충무로의 절반 이상이 아는 얘기다. “우선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캐릭터도 딱이다 싶어서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바로 결정했어요.” 나난은 원형탈모증 때문에 우울한 기분으로 시작한 어느 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장에서 좌천되고 남자친구에게도 차이는 인물이다. 선의와 열정을 갖고 매사에 임하지만 어째 세상은 그녀 편이 아닌 듯 잘되는 일이 없다. 거기엔 나난의 성격도 한몫할 터. “참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덜렁대고, 한 템포씩 늦고, 착각도 많이 하고, 넘겨짚는 눈치가 별로 없는 면이 말이죠.”

그렇게 따져보면, 데뷔작 <자귀모>에서 최근작 <국화꽃향기>까지 장진영은 자신의 엉뚱한 내면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적이 없었다. <국화꽃향기>에서처럼 청아한 멜로 연기나 <소름>에서와 같은 극한의 감정 표출 대신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기만 하면 되니 <싱글즈>의 연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 편하고 쉽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쉽지 않았어요.” 장진영은 짧게 끊어친 뒤 <싱글즈>의 어려움을 설명한다. “이게 코미디 분위기가 있지만, 코믹 연기를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뭔가 재미는 줘야 하는데 오버액션은 할 수 없더라고요. 사실, 평상시 모습이라는 게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오버도 할 수 있고 그런 건데, 영화란 게 캐릭터의 일관성을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 걸 계산하는 게 고민이었어요.” 며칠 전 배우들을 부르지 않고 스탭들끼리만 테스트 시사를 했다는 이야기에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자신의 연기를 빨리 확인하고픈 마음이 간절한 탓이다.

그럼에도 <싱글즈>는 본인과 비슷한 또래인 20대 후반 여성의 일상사를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적이고 즐거웠다고 장진영은 기억한다. 영화의 이야기 모두가 스스로 겪었거나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지금 여기 우리의 것이라는 느낌을 줬다는 거다. “나난이 남자와 섹스를 하는 이상한 꿈을 꿨다고 동미한테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동미는 이렇게 말해요. 넌 너무 섹스에 굶주렸다. 벌써 거미줄 칠 때가 되지 않았냐, 고. 친구들과 평상시에 하는 얘기와 진짜 똑같이….”

장진영의 최근 출연작 목록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소름> <국화꽃향기> <싱글즈> 모두가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남자주인공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영화들이다. 차기작 <청연> 또한 비슷한 맥락의 영화. 장진영은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그리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박경원 역을 맡게 된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만 여성 캐릭터가 강조되는 건 정말 드물어요. 그러니 운이 굉장히 좋은 거죠. <물랑루즈>를 보면서 그런 역을 맡고 싶어서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는데, 어디 그런 영화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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