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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에서 무협영후 정패패(鄭佩佩)를 만나다
김현정 2003-07-18

내 속엔 아직도 협객의 피가 흐른다

‘홍콩영화의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쇼 브러더스 회고전을 준비한 부천영화제는 그 전설의 아름다운 핵심 정패패를 초대했다. 정패패는 회고전 중 두편 <대취협>과 <금연자>에서 모두 금연자를 연기한 배우. 그녀는 대조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호금전과 장철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영감은 초월적이거나 뜨거운 무협의 기운으로 다시 바다 건너 소년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설을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긴장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서울 외곽 메이필드호텔. 옛 영화처럼 수목이 무성한 정원을 앞에 두고 걸어나온 정패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와 자신이 함께한 감독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 편집자

정패패는 1960년대 ‘무협영화의 여왕’(武俠影后)이라고 불렸던 배우다. 끝부분이 제비 날개처럼 날카로운 비수 두 자루를 휘두르는 여검객 금연자(金燕子)로 기억을 남긴 정패패는, 홍콩 무협영화의 양대 산맥이었던 호금전과 장철 두 감독 모두의 주인공이었다. 아름답고, 두려움 없이 적들을 맞아들이고, 무(武)의 기예와 협(俠)의 정신을 갖춘 금연자. 정패패는 스무살 무렵 어린 나뭇가지 같았던 삼십년 전에도, 마른 나무지팡이처럼 단단한 원한을 품고 제자를 키워낸 <와호장룡>의 푸른 여우였을 때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검의 여왕’(The Queen of Swords)의 위세를 잃지 않았다. 그런 정패패가 한국을 찾았다. 여전히 가벼운 몸놀림과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간직한 그녀는 기꺼운 어조로 옛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남자배우들과 똑같은 혹독한 훈련과 힘든 촬영도 무서운 줄 몰랐나보다”라면서. 한 장르의 영화 전체가 추앙했던, 이제 오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배우답지 않게,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소박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무협영화와 소통했던 방식과도 가까운 것인지 몰랐다.

# 호금전과 <대취협>의 기억

<대취협>

<금연자>

호금전은 몇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스무살의 정패패를 오페라 공연장에서 발견했다. 상하이 출신으로, 쇼 브러더스 산하 배우양성소인 남국실험극단을 졸업한 정패패는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배운 예쁘고 유연한 여배우였다. 대단히 박식했지만 무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감독과 검술보다는 검무에 익숙했던 주연배우. 아마도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홍콩 무협영화의 전기라고 할 만한 <대취협>이 태어날 거라고 상상한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패패는 감독으로서, 스승으로서 호금전에 대해 단호했다. “호금전은 무술엔 문외한이었지만, 베이징오페라를 무척 좋아해서 오래 연구했다. <대취협>은 무협영화이면서도 오페라에 가까운 영화였다. 베이징오페라에 쓰이는 음악과 동작이 모두 나왔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험을 했고, 그 결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을 지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호금전은 무술에 능숙한 배우를 쓰라는 영화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정패패를 기용했으며,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 나의 또 다른 삶”을 선물한 감독이었다. 정패패는 모든 것의 처음이라는 점에서 <대취협>을 즐겁고도 놀라운 경험으로 추억했다.

호금전이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전화점을 마련해준 <대취협>은 도적떼에 잡혀간 남동생을 구하기 위해 홀로 나선 검객 금연자의 이야기다. 금연자와 도둑들의 대결을 한축으로,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고수 취협과 타락한 그의 사형이 또 다른 극적 줄기를 이루는 영화. 정패패는 이 영화에서 일층과 이층이 시원하게 트였지만, 결코 그 밖으로는 벗어나지 않는 객잔에서의 일 대 다(多) 혈투를, 버드나무처럼 휘어지는 몸짓과 그 끝에 찌르듯이 냉기를 발하는 비수의 일격으로 연기했다. 그 영화에서 정패패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화선지처럼 펄럭이는 여백의 액션을 선보였고, 그것은 호금전이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예상과 달리 자신이 캐스팅된 이유를 “무술인 출신 여배우들은 동작이 딱딱했다. 하지만 나는 무용을 오래 했기 때문에 훨씬 우아했고, 호금전이 바라는 영화에 들어맞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호금전과 정패패는 이해만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호금전은 정패패에게 영혼을 기르도록 가르쳤다. 아직도 불세출의 여협객으로서 자부심을 드러내는 정패패는 “호금전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두고두고 협객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금전은 자신의 히로인이 협객으로서 당당한 외양뿐 아니라 그 마음가짐까지 다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날카롭고 강인하며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만 협(俠)의 정신이 내부에서 외부로 우러나올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모든 것을 쉽게 배우고, 웬만하면 잊지 않는 나이 스무살에 받아들인 그 가르침은, 노년에 접어든 쉰여섯 여배우의 조그만 자세 하나에도 속속들이 배어 있었다. 정패패는 친절하고 예의바르지만 또한 솔직하면서 말을 돌리지 않았다. 옷자락에도 서리가 앉을 법한 검객의 풍모가 애교 많은 미인의 웃음 뒤에서, 여전했다.

# 장철과 <금연자>의 기억

<와호장룡>

정패패는 “호금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며 “그에게 너무나도 좋은 감정”을 갖고 있고 “재능 많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장철을 기억하는 그녀의 태도는 이와는 매우 달랐다. 장철의 영화 <금연자>는 <대취협>의 금연자를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였지만, 정패패가 “<금연자>의 금연자는 <대취협>의 그녀와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변질됐다. 금연자가 강호를 떠난 뒤, 그녀를 연모했던 사형 은붕은 악당들을 살해하고선 그 자리에 금연자의 표식인 제비모양 금비녀를 남겨놓는다. 금연자가 강호의 분란에 휘말려 다시 세상에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금연자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한도는 그런 은붕을 질투해 결투를 벌인다. 정패패는 “장철은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 호금전과는 많이 달랐다. 그의 영화는 대단히 남성적이며, 그래서 근육을 자랑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 남성들을 위해 협객 금연자는 사라졌다. 호금전이 장검에 익숙하지 않은 정패패를 위해 고안한 두 자루 비수, 그 무기들이 그리던 기(氣)를 품은 곡선은 무술의 달인 장철 앞에서 짧게, 끊어지듯 내지르는 주먹 같은 파워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름답지 않으나 파괴적이었던 그 파워는 금연자가 은붕의 무덤 옆 초막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다소곳이 숙인 목선으로 증발해버렸다. 그러므로 정패패가 바라본 <금연자>의 금연자는 “협객이 아니라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일 뿐이었다. 남자로 인해 강호에 끌려나오고, 남자를 위해 초야에 몸을 묻는,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금연자. 정패패가 그녀를 좋아할 수 없는 까닭은 어쩌면 그뒤에 이어진, 금연자가 아니라 정패패로서의 삶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패패의 경력은 미국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1970년대에 백지로 남아 있다. 정패패는 친구와 스승이 있고, 버릴 수 없는 삶이 남은 영화계에 미련을 못 버렸지만, 남편은 그녀가 연기를 그만두길 바랐다. 이혼, 영화와 TV물 제작으로 인한 파산. 그렇게 돌아온 홍콩에서 정패패는 더이상 여왕이 아니었고, 무협영화는 대가들과 함께 몰락한 뒤였다. 그녀는 “배우는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연기를 하기 위해선 이전의 자신을 전부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배우다”라고 믿으면서 까마득한 후배 주성치의 영화 <당백호점추향>에서 처음으로 코미디 연기를 했다. “성룡과 홍금보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들이 나를 잘 따랐었고, 많이 도와줬다”지만, 그녀는 크지 않은 역을 위해 주성치의 영화 전부를 다시 보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십이 훌쩍 넘은, 한때 여신과도 같았던 여배우의, 생각지도 못했던 재림. 정패패는 “나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면서도 “여성은 독립심이 강해야 한다”는 말로 쉽지 않았을 고난을 의지섞인 극복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필 모 그 래 피

정인석 情人石 1964 | 난서지가 蘭嶼之家 1965 | 보련등 寶蓮燈 1965 | 대취협 大醉俠 1966 | 철선공주 鐵扇公主 1966 | 향강화월야 香江花月夜 1967 | 망교왜 網嬌娃 1967 | 신검진강호 神劍震江湖 1967 | 용호구 龍虎溝 1967 | 염양천 艶陽天 1967 | 금연자 金燕子 1968 | 홍랄초 紅辣椒 1968 | 옥나찰 玉羅刹 1968 | 독룡담 毒龍潭 1968 | 비도수 飛刀手 1969 | 호담 虎膽 1969 | 용문금검 龍門金劍 1969 | 황강여협 荒江女俠 1970 | 오호도룡 五虎屠龍 1970 | 종규낭자 鍾규娘子 1971 | 철왜 鐵娃 1973 | 호변자 虎?子 1974 | 천하제일 天下第一 1983 | 칠소복 七小福 1988 | 열일여왜인 烈日女娃人 1989 | 당백호점추향 唐伯虎點秋香 1993 | 방가황칠휘 방架黃七輝 1993 | 영춘 詠春 1994 | 비주초인 非洲超人 1994 | 정인적정인 情人的情人 1994 | 난세초인 亂世超人 1994 | 운패오복성 運 敗 五 福 星 1996 | 진심화 진心話 1999 | 중화영웅 中華英雄 1999 | 생사권속 生死拳速 2000 | 와호장룡 臥虎藏龍 2000 | 무신흑협 武神黑俠 2001 | 네이키드 웨폰 赤裸特工 2002 | 용등호약 龍騰虎躍 2002

# 스타가 아니라 배우로 살아가기

정패패가 <와호장룡>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의지와 독립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번도 악역을 해본 적이 없었고, 리안에게 “내가 나쁜 여자처럼 보여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호금전과 함께 또 다른 스승으로 마음에 새기는, <보련등>의 감독 악풍은 “배우는 어떤 기회도 마다해선 안 된다”고 그녀에게 “스타가 아니라 배우로서의 삶의 지침”을 가르쳤다. 정패패는 세대를 가로지르며 무협의 정신을 설파하는 그 영화가 마음에 들어 악역이라는 사실을 꺼리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 <대취협> 시절보다 부드럽게 마모된 얼굴을 갖게 된 정패패는 푸른 여우에게서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사연을 가진,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을 발견하는 아량도 키웠다. <와호장룡>을 처음 떠올렸을 때부터 양자경과 정패패를 낙점한 리안에게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정패패 역시 행운을 잡았다. 명성이나 인기가 아니다. 정패패는 “지적이고 연구를 많이 하고 온화하다는 점에서, 호금전과 많이 닮은” 감독을 만난 것이다. 호금전을 잊지 못하는 그녀에게 <와호장룡>은 기쁜 경험이면서 서운한 회한이었다.

<와호장룡>은 정패패가 오랜만에 출연한 무협영화였다. 세상은 달라졌다. 자신이 출연한 60년대 무협영화들이 디지털 리마스터링 과정을 거쳐 거짓말처럼 선명해진 DVD 시리즈로 출시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패패는 “요즘 젊은이들은 참 똑똑하기도 하지”라는 감회를 느꼈다. <와호장룡> 현장은 그랬던 그녀에게 더한 격세지감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실험을 했고,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그런 시절이 쌓여왔기 때문에 무협영화의 기술이 이만큼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어려웠던 장면들을 너무나 쉽게 찍는 광경을 보니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예전엔 물 위를 미끄러지는 장면을 찍으면서도 어설펐는데, 와이어를 감쪽같이 지우다니….”

그러나 정패패는 나이든 사람이라면 한번쯤 겪을 수밖에 없는 심정을 털어놓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나는 최초의 여협객이었다. 기술로든 체력으로든 젊은 사람을 능가할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소년들의 피를 덥혔던 <금연자>, 그 영화가 상영되는 부천에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장할 정패패.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김홍준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들떠했다. 설사 그 뜨거운 박동을 공유하지 못했던 세대라 할지라도 호금전과 장철, 리안을 사로잡은 정패패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난데없는 흥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화질 나쁜 비디오와 <와호장룡>만을 봤는데도, 처음 본 순간 “아름다우십니다”라고 외치고 말았으니.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