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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똥개>를 보고 슬픈 `도꾸`를 떠올리다

남루함을 일류로 만드는 법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을 여는데 뭔가 허전했다. 평소 같으면 마루 밑에서 달려나오던 ‘도꾸’가 보이지 않았다. 뒷마당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에 가봤더니, 도꾸는 5년간 걸쳤던 가죽점퍼를 벗어놓고 큰 대야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도꾸의 가죽점퍼는 모닥불 위에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집 안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개 살려내”라고 땡깡을 부렸다. 영세한 연탄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인부들의 여름휴가 보너스로 줘버렸노라고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다. 며칠 뒤, ‘도꾸’의 뼈를 몇개 건져서 뒷마당에 파묻고 강아지풀 꽂고 동생 불러서 절했다. 그 이후 다시는 개와 교우하는 일이 없었다.

커서도 한동안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애완견만 보면 까닭 모를 적개심이 일었다. 치와와는 쥐새끼의 돌연변이처럼 보였고, 시추는 머리도 나쁜 것이 먹는 것만 밝혀서 보기 싫었다. 무엇보다 이 종자들은 허접한 교태나 떨면서 인간에게 도움되는 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점이 못마땅했다. 그러다 보니 이 개들을 끼고 도는 사람들까지 이상하게 보였다. 꽃등심 구워먹으면서 치와와 발 닦아주는 한가하고 위선적인 종자들! 그런데 사실 이런 논리는 말이 안 된다. 소와 개를 다 잡아먹는 것보다는 소만 잡아먹고 개는 살려두는 것이 두배 착한 거다. 소에게 미안하니 개까지 잡아먹자는 평등 감각은 그 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칼날 같은 불모의 형식논리이다. 그런데, 나는 왜 치와와까지 잡아먹지 않는다고 화를 냈을까? 아마도 그것이 이름도 성도 없이 자기 종족의 명칭만으로 불리는 구박을 감내하다가 죽어서는 고기를 남긴 도꾸에 대한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치와와 타박한다고 도꾸가 살아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버림받은 것은 사랑해준 사람의 기억 속에 지독한 흔적을 남김으로써 불멸을 기도하는지도 모르겠다.

곽경택 감독이 도꾸를 추억하는 방식은 좀 다르다. 그는 치와와를 구박하는 시간에 도꾸의 종족인 똥개들에게 탐닉한다. <억수탕>에서 <똥개>에 이르기까지 곽 감독의 영화에는 어떤 기묘한 일관성이 있다. 나는 그걸 남루함에 대한 촉각적 애착이라고 부르고 싶다. 찌그러진 동네 아줌마들의 육체, 학교에서 쫓겨난 불량배, 라면 먹고 고기 먹은 놈한테 덤볐다가 사망한 권투선수, 엄마 대신 똥개와 정을 나누며 성장한 정말 한심한 동네 건달. 이들의 공통점은 남루함을 몸에 달고 있다는 점이다. 남루함은 선악을 넘어 인간 감각이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영원한 타자의 질감이다. 그래서 남루함을 화면에 들이밀면 관객은 반사적으로 불편해진다.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관객을 불편하게 한 것도 중증 뇌성마비 처녀를 전면에 들이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은 다른 여자처럼 남자와 사랑하고 섹스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당신들은 이렇게 소박한 것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면, 관객은 ‘그래요’라고 대답할 수 없다. 관객 입장에서는 고매한 종교적 관념으로 치장된 적선이 훨씬 쉽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그토록 숭고한 관념을 끌어들이면서 행한 자선이 한 양아치의 치기보다 실제로 해준 게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질문은 참담한 것이고, 뇌성마비의 남루함이 주는 감각적 불편함 때문에 그녀를 타인처럼 대할 수 없었다는 자각은 더 참담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나 예수가 아닌 누가 이 남루함을 온전하게 품을 수 있겠는가? 남루함을 전시하는 행위는 우리가 진선미라고 말하는 가치의 궁극적 지향을 거듭 환기시켜주는 소금 역할도 하지만, 과도하면 인간 조건의 한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아놓는 가치를 파괴하는 독약이 되기도 한다.

곽경택 감독은 이 지점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는 불편하지 않게 남루함을 들이미는 레토릭을 알고 있다. 그 비결은 웃음이다. 그는 너무 한심해서 귀여운 지경으로 남루함을 들이민다. 그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나는 이런 레토릭은 정말 남루한 것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상업적 장치들을 끌어들이든 간에 ‘남루한 질’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어법은 다분히 환유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를 상업영화라고 말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며, 대중영화라고 말한다. 모든 일류적인 질은 삼류 속에 아스라이 파묻혀 있고, 곽경택의 영화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질이 있다. 비록 미세한 함량이긴 하지만.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