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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와 정절녀가 통하였더냐,<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김혜리 2003-09-30
■ Story

때는 조선 후기 정조 치세. 유판서의 정실부인인 조씨(이미숙)의 집에 벼슬길을 마다하고 풍류나 즐기며 사는 사촌동생 조원(배용준)이 찾아온다. 첫사랑인 서로를 오래전 포기해야 했던 두 사람은 이후 사랑을 냉소하며 비정한 호색가로 살아왔다. 조씨 부인은 아들을 얻기 위해 남편이 소실로 들이는 처녀 소옥(이소연)을 임신시켜달라고 조원에게 요구하지만, 조원의 목표는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정절녀 숙부인(전도연). 결국 숙부인을 함락시키면 조원에게 조씨가 몸을 허락한다는 거래가 성사된다. 숙부인이 출석하는 천주학 집회부터 치밀하게 공략해가는 조원. 소옥과 옆집 권도령(조현재)의 풋사랑이 사태에 뜻밖의 변수를 더하지만, 게임의 더 큰 반전은 숙부인의 진심을 바라보는 조원의 가슴속에서 싹튼다.

■ Review

연주에 앞서 현을 가다듬는 양악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으로 막을 올리는 시대극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이제부터 이질적인 것들이- 혹은 그리 믿고 있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 통고한다. 과연, 영화의 서주부는 여인의 누드를 그리다말고 벌이는 대담한 정사와 얇은 장지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엄숙한 문중제의를 오락가락한다. 제삿날 시집에 간 며느리가 부엌을 빠져나와 연인에게 달려가던 감독의 전작 <정사>의 뜨거운 대목이, 대뜸 한 호흡에 펼쳐진다.

지체 높은 조선 사대부 남녀의 정사와 순애보를 그린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무엇보다 ‘번안’이라는 양식의 성실한 실험이다. 인물과 일화는 원작의 치마폭 안에서 최소한 변조됐고, 팽팽한 설전이 오갈라치면 가야금 대신 하프시코드가 차르랑거리며 추임새를 넣는다. 이재용 감독이 불러낸 추문의 주역은, 쇼데를로 라클로가 쓴 원작과 동명영화 <위험한 정사>의 메르테이유 후작부인, 비콩트 발몽, 투르벨 백작부인의 ‘도플갱어’들이다.

부유한 양반인 조씨 부인과 사촌동생 조원은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를 우습게 알지만, 그 사회가 제공하는 안락한 틈새에 드러누워 산다. 첫사랑으로 순정을 매듭짓고 이후로는 “나도 어찌할 수 없다”며 함부로 심신을 굴리는 두 사람은, 어찌보면 금욕적인 인물이다. 열정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본성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랑에 연연하는 어리석은 뭇 남녀를 농락하는 그들의 행각은 절반은 가학이되 절반은 자학이다. 반면 숙부인은 아는 게 그뿐인 열녀가 아니라 “평판에 휘둘리지 않고 믿는 일을 행하는” 온유한 카리스마의 여성이다. 후일 숙부인이 선택하는 길은 그녀가 천주학에 경도됐음을 돌이킬 때 더욱 애달픈 바 있다.

그러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겹겹의 장신구에 가려진 상류사회의 공동(空洞)을 갱스터에 가까운 신랄함으로 들추어냈던 마틴 스코시즈의 <순수의 시대>나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처럼 터프하지 않다. <스캔들….>의 거지반은- 놀랍게도(!)- 코미디이다. 흥미롭게도 <스캔들…>의 웃음은 시나리오로 읽을 때보다 인물을 둘러싼 물리적 현실의 부피가 감각으로 전해지는 영화로 볼 때, 또한 혼자보다 여럿이 볼 때 배가 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문화적 금제와 예스런 말투를 비집고 나오는 <스캔들…>의 ‘진담’들은 집단 카타르시스가 어린 웃음을 부른다. “소리를 지를 테요!”, “사내가 다정스럽기도 하지” 같은 심상한 대사, 불현듯 현대의 관객과 교감하는 능청스런 눈짓 하나 하나가 죄다 펀치라인이 된다. 순진하기만 한 원작의 세실과 달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소옥의 존재도 희극성에 탄력을 준다. 원작의 또 다른 리메이크인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 택한 분방한 뉴욕과 정반대로 제약이 한층 강고한 조선사회라는 배경은 이쯤 되면 장애가 아니라 에너지다. 번안을 통한 이같은 장르의 굴절은 <스캔들…>이 탄탄한 내러티브의 단순한 복제물이 아니라 신선한 해석본으로 발돋움했음을 보여준다. 코믹한 전반부와 대조적으로 얌전하게 진정한 사랑의 승리를 그려가는 후반부의 멜로드라마가 가지런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캔들…>은 흥행의 혈을 짚는다. 뼈대로 보면 코미디로 전개부까지 끌어가다가 멜로로 절정과 대단원을 마감하는 점이 한국 흥행영화의 공식과 멀지 않고 “그들도 우리처럼”이라는 당돌한 전제로 과거를 바라본 아이디어 역시 최근 눈길을 끈 <다모>나 <대장금> 같은 TV사극과 통한다. 가마에 넣는 요강까지 챙기는 <스캔들…>은 ‘웰메이드 시대극’으로서 포만감을 안긴다. 어디를 보아도 야무진 프로덕션디자인은 물론이고 잘게 쪼갠 컷과 정중동을 포착하는 카메라가 과거가 현실과 비슷한 박자로 흐르게끔 돕는다. 연기는 대체로 큰 역부터 작은 역까지 첩지를 받을 만하다. 이미숙은 눈썹의 꿈틀거림만으로 객석을 쥐락펴락하고, 자신과 타인을 비웃는 연기로 관객까지 웃기는 배용준은 스크린에 안착했다. 게임의 승부가 가려지고 마지막 꽃잎이 흩날려도 정숙히 자리를 보존할 것. 그럴듯한 후일담이 엔딩 크레딧 뒤에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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