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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랭이 제작사도 별수없지?
2001-05-23

한국영화회고록 - 심우섭 감독편 12

<팔도 노랭이>(1970)의 성공으로, 제작사인 태창흥업사는 투자비의 3배 가까운 이익을 남긴다. 그러나 정작 나의 심기는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69년부터 시작된 태창과의 관계는, 그해 동안만 <특등비서> <요절복통 일망타진> <무정한 검객> 등 세편을 연달아 같이 제작하면서 돈독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 <팔도 노랭이>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촬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촬영기사가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는 일이 있었던지 가불을 청하러 태창 기획실의 김성태를 찾았다. 김성태는 곤란한 표정으로 몇번을 거절하더니 결국 수락을 했는데, 대신 개런티에서 그 액수만큼 제하겠다고 나왔다. 그때고 지금이고 감독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두말할 나위없이 같이 일하는 스탭이었다. 배우도 그 다음이다. 나에겐 확고한 원칙이 있었는데 스탭들에게 그들이 일한 만큼의 정당한 액수를 쥐어주는 것이다. 간혹 초기 자금이 부족해 외상형식으로 먼저 일을 해주더라도 중간에 약간의 돈이 생길 때마다 그들에게 나눠주던 나였다. 정말 돈이 부족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푼도 줄 수 없을 때에도 평소의 나를 알기에 남아 주던 그들이었다. 그 일은 당장 내 귀에 흘러들어왔고 감독으로서 자존심이 상한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당분한 화를 누르기로 했다. 영화는 무사히 흥행대열에 들어섰고 그제야 나는 태창에 관계를 끊을 것을 통보했다. 그들과 다시 손을 잡은 것은 그로부터 4년이 흐른 뒤였다. <의처소동>(1974)으로 예전의 관계를 회복한 뒤 79년 <마음 약해서>까지 3편의 작품을 함께한다. 태창과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는데 <팔도 노랭이> 일로 손을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의 일이다. 태창은 당시 나를 괘씸하게 여겼고, “심우섭이 있어야만 코미디를 만드냐”며, 바로 다른 감독을 섭외하여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그때 내 밑에서 연출부 서드로 일하던 친구를 데리고 가 새 감독의 연출부 퍼스트를 시켰다. 그 친구가 감독이 딱해 보였던지 조언 비슷한 걸 했는데, 그게 “심우섭을 보니 서영춘을 데리고 짭짤한 소득을 보더라”였던 모양이었다.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태창은 바로 서영춘을 기용해 주연을 시켰다. 하지만 코미디를 아무나 한다는 생각이 경솔했달까, 영화는 개봉 직후 소리소문없이 간판을 내렸다. 결국 태창은 5천원의 가불금을 아끼려 500만원의 투자비와 그보다 훨씬 많을 이익을 포기했던 것이다. 코미디만큼 치밀한 계산과 연출력이 필요한 장르가 또 있을까. 코미디는 서스펜스를, 액션이나 스릴러, 혹은 그 밖의 다른 어떤 장르보다 잘 이용해야 하는 장르이다. 역으로 말하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 줄 모르는 긴장감’이란 어느 영화에나 쓰이는 요소이긴 하지만 코미디 장르에서만큼 강력하고 또한 요긴하게 쓰이지 못한다. 웃음 자체가 서스펜스이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즐기는 코미디와 영화 속 코미디는 또 다른 것이다. 서영춘이나 배삼룡과 같은 코미디의 달인들을 기용하고도 영화가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개인기에만 의존하고 그에 걸맞은 플롯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극이라면 일인극이 가능할지 모르나 영화에서는 원맨쇼가 통하지 않는다. 코미디영화를 만드는 자라면 단지 보이는 것, 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머리로 생각해서 웃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럴듯한 상황을 제시하여 웃음의 계기를 만들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감의 끈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최후의 순간을 위해 웃음보따리를 열지 않고 꼭 쥐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배삼룡과 <나의 인생고백>(1974)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번씩 일본 야마다 요지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를 떠올렸다. 69년부터 27년간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를 무려 48편이나 만든 그와 암으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시리즈를 함께한 배우 아쓰미 기요시를 나와 배삼룡에게 대입했던 것이다. 우리 관객도 일본관객처럼 한 감독을, 그리고 한 배우를 질리지 않고 계속 쳐다봐줄 것을 마음속 깊이 바라고 또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배삼룡도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기엔 의지가 부족했다. <나의 인생고백2>(1975)를 만들고 배삼룡은 다른 감독에게 가버렸고, 나 역시 곧 다른 작품으로 눈을 돌렸다.

구술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팔도며느리> <마음 약해서> 등 연출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